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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나리의 시시각각

나이가 궁금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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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간혹 외국인을 인터뷰한다. 대화 말미엔 어김없이 난감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실례지만 나이가 몇이세요?”

 상대방으로선 별로 해 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질문일 게다. 서구뿐 아니라 중국·일본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나이를 묻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내겐 의무사항이다. 외국과 달리 국내 대다수 미디어는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를 밝히는 걸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이는 핵심 정보다. 그 하나로 많은 걸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경험, 지식, 성향, 인격. 마치 공인된 ‘연령별 인생표준’이라도 있는 양, 너무 늦게 혹은 빨리 뭔가를 한 인물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요 며칠 미디어 헤드라인을 휩쓴 것도 한 청년의 나이였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은이다. 부친 사망에 따라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급부상한 그는 27세, 어쩌면 29세라고 한다. 연륜과 경험이 짧아 한반도에 큰 혼란을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낮은 연령=애송이=미숙아’라는 통념에 지나치게 기댄 몇몇 논평은 다른 층위의 걱정을 낳는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20대의 어리고 경험 없는 젊은이에게 세계가 굽실거리는 것은 21세기의 기막힌 코미디”라고 꼬집었다. 한 신문은 “29세 청년과 (40세 위인 이명박 대통령이) 한반도 미래를 논의하기는 참…” 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현 정권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는 어려우리라 전망했다. 틀린 말들은 아니지만 상대는 대한민국 최대 위협세력의 새 수장이다. 기득권층의 강력한 보위 속에 있으며, 실력부터 성격까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얕잡아보다 자칫 큰 코 다친다는 소리다.

 오판을 부르는 나이의 함정은 도처에 있다. A씨는 마흔에 SK그룹 주력 계열사의 상무가 됐다. 이후 몇 년간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종종 했다. 머리가 쉬 세지 않는다고 속상해했다. “어리고 동안(童顔)이라 대외활동은 물론 회사 안에서도 어려움이 많다”는 거였다. 이른바 ‘초년출세의 역설’이다. 반면 구직자들은 기업의 암묵적 취업 제한 연령에 걸릴까 노심초사한다. 둘 다 연령에 대한 예단과 선입견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또 어떤가. 젊은이들조차 빠른 88년생이니 재수한 01학번이니 하며 서열 다툼을 벌인다. 속된 말로 족보가 꼬여 교통정리에 애를 먹기도 한다. 이처럼 ‘나이가 깡패’인 상황에선 열린 토론도, 공사 구분도, 객관적 평가도 쉽지 않다. 나이 따지는 풍토가 퇴행적 연공서열과 상명하복의 버팀목인 이유다.

 이런 문제의 뿌리로 전통적 유교문화를 드는 이가 많다. 한데 유교가 신앙이던 조선조 양반들은 외려 나이를 뛰어넘는 친교와 배움을 생의 보람으로 여겼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처럼 5살 정도 위아래끼리는 서로 ‘호’를 부르며 대등하게 어울렸다. 매월당 김시습은 무려 19세 연하인 추강 남효온과 역사에 남을 고아하고 애절한 우정을 나눴다. 그러니 지금 같은 서열 중시 문화는 근대 이후 고착된 것으로 봐야 할 게다. 군사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나이나 연륜을 뜻하는 은어 ‘짬밥’만 해도 애초 의미는 ‘군대 밥’이다. 여기 경쟁사회의 치열함이 더해지면서 순위에 대한 집착 또한 강화된 것이리라.

 어떤 이에겐 이런 논의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너도 쉰 되고 예순 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하는 소리다. 나이의 족쇄는 노소를 안 가린다. 고령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물론이요, 스스로 나이 대접 받으려는 맘을 못 버리면 힘들어진다. 100세 시대에 두 번째 직업은 필수다. 젊은이에게 배우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나이 안 따지는 훈련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연령과 지위를 짝 짓는 습관만 내려놔도 세상이 더 잘 보이고 인생의 선택지가 늘어날 것이다. 신문에 취재원의 나이를 병기하는 일 또한 언젠가 사라져도 좋지 않겠는가.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