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근혜·이재오·정몽준·김문수가 만나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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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자기중심적인 당 쇄신안을 내놓은 지 하루 만에 사퇴했다. 내년 총선 후보 공천과 재창당을 그가 주도하겠다는 발상이 역풍을 불러 홍 대표의 수명을 앞당긴 셈이 됐다. 그가 제시한 방안은 ‘쇄신 아닌 꼼수’로 비쳤고, 대다수 의원과 당원은 등을 돌렸다. 버티기를 하던 그가 축출당하는 듯 퇴진하는 걸 지켜보면서 정치인이 물러날 때를 놓치면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홍 대표가 사퇴함에 따라 한나라당엔 변화의 바람이 확산할 걸로 보인다. 당을 존속시키되 대폭 쇄신하고 개혁하자는 리모델링론, 당의 수명이 끝났으니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건설하자는 재창당론, ‘박세일 신당’ 등 외곽의 보수세력과 합쳐야 한다는 보수대통합론 등 쇄신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느니, 조기에 선거대책위원회를 발족해 위원장직을 맡겨야 한다느니, 당헌의 당권·대권 분리 규정(대통령 후보는 대선일의 1년6개월 전부터 당직을 맡을 수 없다)을 개정해 한나라당이든, 신당이든 당 대표 자격으로 총선을 치르게끔 해야 한다느니 의견이 분분하다.

 박 전 대표의 조기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으나 박 전 대표는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측근들은 “장고(長考)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 전 대표는 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등장이 계파 간 갈등이나 권력투쟁을 촉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를 ‘구원투수’로 징발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면 당이 분열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친이명박계, 친박근혜계, 그리고 소장파는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부터 형성해야 한다. “친이명박계 일부가 박 전 대표 등판론을 주장하는 건 올려놓고 흔들기 위한 것”이라거나, “박 전 대표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면 친이계가 공천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등의 의심이 말끔히 사라지도록 계파 해체 등 당을 화합시키는 조치가 먼저 취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박 전 대표와 이재오·정몽준 의원, 김문수 경기지사 등 당에서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일 필요가 있다. 그간 서로 불신하고 견제했던 당의 대주주들이 머리를 맞대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다음 그 내용을 의원·당원들 앞에 제시하고 의견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된 쇄신이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만일 박 전 대표가 혼자서 궁리한 쇄신 구상을 내놓고, 그걸 친이계가 비판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박 전 대표는 등판하자마자 상처를 입게 되고, 한나라당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홍 대표 퇴진 이후의 수순이 더 중요하다는 걸 한나라당은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