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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담긴 서양 문명의 뿌리 찾기

중앙일보

입력

그리스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그러나 그리스 신화를 꼼꼼히 읽은 사람은 인구에 회자하는 만큼 많지 않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생김새를 알맞추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신화의 재미는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와 많은 차이를 갖는 서양 문명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신화 속 주인공들의 끊임없는 변신이 그들의 이미지를 정확히 새김질하기 어렵게 하는 것.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미술로 보는 20세기〉등의 저서를 낸 바 있는 미술평론가 이주헌 님의 새 책 〈신화, 그림으로 읽기〉(학고재 펴냄)는 그런 뜻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책. 지난 해 겨울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과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과 조각 도판, 신화의 배경이 된 곳들에서 촬영한 사진 등을 기본 자료로 필자가 여행 중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사색한 결과를 기행문 형식으로 엮어 펴낸 것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에서 필자는 가족과 함께 그리스 신화의 발상지인 그리스와 지중해 연안 지역 곳곳을 여행하며 느낀 사색의 결과를 모았다. 필자는 "진정한 공부란 지식을 주입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과 대화하는 것, 삶과 대화하는 법을 깨우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공부가 아닐까. 그와 관련해 이곳 그리스는 한번쯤 들러볼 필요가 있는 땅이다"(이 책 46-47쪽에서)라며 그리스 답사 여행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리스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은 결국 문명과 대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제우스 신전에서의 숨바꼭질에서 고대 올림포스 신들과의 숨바꼭질을, 달리기 시합을 하는 아이들의 아우성에서는 옛 그리스인들의 타고난 경쟁심을 끄집어낸다. 어스름 녘 아테네 제우스 신전을 뒤돌아보며 화려했던 그리스 문명이 남긴 영고성쇠의 무상감을 느끼는 식이다. 곧 이어 필자는 변신의 귀재였던 그리스 신들의 변신은 옛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그때보다 더 큰 영광과 권세를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누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머리글에서 동양에 패배를 던져준 서양 문명의 뿌리를 캐보겠다는 것에 이어지는 화두인 양.

아이들의 아우성은 계속된다. 기원전 5세기 께 만들어진 청동 조각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 앞에서 포세이돈의 포즈를 흉내내는 아이를 바라보며, 필자는 예술의 발생을 '모방'으로 설명하는 영국화가 조지프 라이트의 그림 〈코린토스의 처녀〉를 떠올린다. 연인의 그림자를 모방하는 처녀의 신비스러운 모습은 곧 마법과 주술로 이어지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서양 문명을 이끌어온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된다는 게 필자의 분석이다. 직관적이고 초월적인 전통의 동양문명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는 설명은 자연히 따라붙는다.

수천년을 넘나드는 필자의 시간 여행은 계속된다.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의 싸움을 그린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가 일반 신화미술처럼 역사와 정치에 관한 의식이 배제된 채 순수하게 신화의 내용만 묘사한 것이 아님을 간파해낸다. 작품이 만들어진 기원 전 5세기 께 페르시아 군 격퇴라는 실제 사건을 표현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그리스인들의 숨겨진 의도가 있었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미술 작품은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필자의 답사 여행 목적인 것. 이는 또 서양 문명과 분명한 차이를 갖는 우리 문명과 어떤 차이를 있는가를 지난하게 사색하는 작업이 이 책의 남다른 점이다.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 속에 나타난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에 머무르는 여느 신화 관련 책들과 분명히 다르다. 우리가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회귀적 시간 관념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아테네는 현재를 과거에서 독립시켜 중시하는 합리적인 태도를 발전시켜 미래지향적인 진취적인 문명을 성취했음을 신화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애쓴 것이다.

본격적인 미술관 여행이 되는 제2부에서 필자는 다양한 도판과 섬세한 설명을 동원, 그리스 신화의 핵심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뜻을 끄집어낸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에로티시즘의 상징 님프, 위대한 인간에서 영웅 신으로 등극한 헤라클레스 등 6명의 그리스 신들이 서양 미술에서 어떤 이미지로 나타나는가를 꼼꼼히 살핀다. 서양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 그리스 신들은 각각 시대에 따라 다른 특징이 화가들에게 포착됐다. 서양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에, 필자는 그림 속에 숨겨진 역사적 배경까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간다.

필자의 자상한 설명과 다양한 사례들로 다소 모호했던 그리스 신들의 이미지가 확연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이를테면 섹스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물의 정령 님프들이 그림 속에 어떻게 표현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 필자는 17세기의 조각 〈아폴론과 다프네〉에서부터 19세기 화가 부그로의 〈산의 님프들〉〈님프의 동굴샘〉, 20세기 에로티시즘의 화가 클림트의 〈물의 님프〉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쯤 되면 그림으로 읽는 신화 여행이 단순히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양 문명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것임을 알 만도 하다.

그리스 신화의 한 주제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도 이 책을 보는 재미 가운데 하나. 변신한 제우스 신에게 겁탈당하는 시돈의 공주 에우로페 공주를 소재로 한 그림의 변용을 보여주기 위해 필자는 16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18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티에폴로, 렘브란트, 구이도 레니, 20세기의 세로프 등의 그림을 총동원하고 있다. 하나의 신화 속 스토리가 여러 화가들을 통해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면서, 그 안에 공통된 서양 문명의 특징과 정수를 찾아내자는 계산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싹튼 그리스 문명은 서양 예술의 뿌리라 할 수 있다. 방대한 그리스 신화 가운데에서 서양 문명의 알맹이를 추려내기 위해 여행지에서 꼼꼼히 챙겨낸 이 책의 이야기와 그림들은 책읽는 즐거움이 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신화는 그림과 함께 읽으면 더 효과적일 것. 얼마 전 출간된 소설가 이윤기 님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런 까닭에서 다양한 도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림과 이야기의 접점을 찾아내려는 신화 읽기의 이같은 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린 시절부터 한번은 빠져들었을 그리스 로마 신화. 오늘 날 인류의 문명과 반문명의 갈등을 주도해 온 서양 문명의 뿌리를 찾아내는 작업의 디딤돌 하나를 보태 준 미술평론가 이주헌 님의 신화 여행. 이 여름 한 번 뒤쫓아 나서볼 만한 일이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신화, 그림으로 읽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
*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
* 미술로 보는 20세기 (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웅진닷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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