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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f가 찾은 최고급 시계 제작 현장 … 스위스 피아제 매뉴팩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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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 시계의 무브먼트들.
12P 무브먼트. 두께 2.3㎜. [피아제 제공]
피아제 시계의 무브먼트들.
838S 무브먼트. 두께 2.7㎜. [피아제 제공]
피아제 시계의 무브먼트들.
1200P 무브먼트. 두께 2.35㎜. [피아제 제공]
피아제 시계의 무브먼트들.
830P 무브먼트. 시계 태엽을 한 번 감으면 60시간 지속되는 ‘파워리저브’ 기능을 갖췄다. [피아제 제공]
피아제 시계의 무브먼트들.
430P 무브먼트. 두께 2.1㎜의 초박형이다. [피아제 제공]

시계의 ‘심장’ 무브먼트(동력장치) 속에서 보석들이 빛난다. 붉은색 루비도, 직경 1㎜ 푸른 금속도 부품일 뿐이다. 이젠 여성에게도 시계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다. 끊임없는 기술혁신의 결정체, 거기에 여성적인 매력까지 갖춘 ‘파워 우먼의 시계’를 들여다봤다.

사례1 내년 4월 아들 결혼을 준비하는 주부 이현경(59)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예비 며느리와 아들 사이에서 오가는 예물시계 얘기가 너무 낯설어서다. ‘투르비옹’을 따지기에 시계 브랜드 이름이라 여기고 물었더니 “중력으로 인한 시간 오차를 줄여주는 장치”란 대답이 돌아왔다. 또 ‘예거 르쿨트르’ 운운하길래 ‘뭐 어떤 기계 장치겠거니’하고 짐작했는데, 이번엔 “시계 회사명”이란 게 아닌가. 예비 며느리의 시계에 대한 취향도 의외였다. 이씨 세대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큼지막한 시계가 좋다는 것이다. 또 시계 속의 태엽이 훤히 비치는 게 진짜 고급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있을라치면,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싶다.

사례2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여성 CEO A씨는 직경 38㎜짜리 시계를 찬다. 여성용 시계 대부분이 34㎜ 이하이다 보니, 38㎜면 남자 시계로 착각할 법한 크기다. A씨는 “가는 팔찌 같은 시계보다 기계적 특성이 드러나는 시계에 더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업무상 처음 만나는 상대 회사 임원·대표가 내 시계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많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어 더욱 좋다”고 덧붙였다. 서로 최고급 시계를 알아봐 주거나, 무브먼트(시계를 움직이는 동력장치)에 대한 지식을 얘깃거리로 삼으면 대화가 한결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A씨는 요즘 새 시계를 물색 중이다. 남성들이 봐도 부러워할 만한 시계를 고르고 있다. 그렇다고 투박해 보이는 시계는 싫다. 우아하면서도 기계적으로 뛰어난, 그야말로 ‘파워 우먼의 시계’를 사는 게 A씨의 목표다.

‘파워 우먼의 시계’가 시계 업계와 여성 소비자의 화두다. ‘파워 우먼’이란 글자 그대로 사회·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인정받는 여성을 일컬음이요, 여기서 말하는 시계는 고도의 기술이 집적된 최고급 시계를 말한다. 시계 전문 칼럼니스트 정희경씨는 “최근 몇 년 새 여성들이 부쩍 남성적인 시계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단순한 장신구에 머물렀던 여성용 시계보다, 기술적으로 완벽의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여성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춘 시계를 찾는 여성이 늘고 있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정씨는 “시계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은 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고급 시계 입문서’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f가 최고급 시계 제작현장을 찾은 이유다. 1874년부터 쉼 없이 시계를 만들어온 ‘피아제 매뉴팩처’에서 최고급 시계 제작 과정을 살폈다. 피아제는 2008년, 미국 시장조사업체 럭셔리 인스티튜트가 미국 최상위 소비자(연소득 10억원, 순자산 180억원 이상)를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바셰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과 더불어 ‘세계 3대 명품 시계’로 꼽힌 브랜드다.

라코토페(스위스)=강승민 기자

시계 브랜드에선 시계조립공장을 ‘매뉴팩처’라 부른다. 영어 매뉴팩처는 일반적인 공장(factory)과 다르다. 수작업이 주로 이뤄지는 작업장이란 뜻에서 손을 뜻하는 ‘매뉴(manu)’가 붙었다. 전통적인 시계산업에서는 ‘오트 오를로제르’라 불리는 시계 장인이 수작업으로 시계를 만들어왔다. 시계 만들기의 첫 번째 작업은 모형 만들기다. 아무리 외형 디자인이 완벽해도 무브먼트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디자인은 폐기된다.

치밀하게 계산된,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피아제 ‘알티플라노 젬셋 스켈레톤’. 시계 이름 중 ‘스켈레톤’은 무브먼트에 필수적인 동력축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제거한 것을 말한다. 내구성을 유지하면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 최고급 시계 제작에만 쓰이는 기술이다. [피아제 제공]

그래서 시계 외형을 디자인하는 부문과 내부의 조립도를 설계하는 부서는 기본적인 밑그림 단계에서부터 함께 일을 진행한다. 1000분의 1㎜까지 계산해 나사와 기어 등 온갖 부품이 맞물리는 공간을 컴퓨터로 그리고 외형 디자인 안에 모든 첨단기술이 온전히 집약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과정을 거친다. 두께 2.30㎜,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무브먼트’로 1960년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바 있는 피아제 매뉴팩처에선 시계 케이스와 부품 사이 간격을 0.02㎜로 줄였다. 육안으론 식별 불가능한 이 차이를 두고 부품과 시계 케이스가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설계하는 것이 노하우다. 내부 설계도가 1차로 완성되면, 치과 치료에 흔히 쓰이는 레진이라는 재료로 실물 크기 외형의 본을 뜬다. 이 본이 디자이너가 의도한 대로 아름답다면 디자인 단계는 마무리된다.

숨겨진 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장인정신

프랑스어로 ‘코트 드 주네브’라는 장식이 최고급 시계의 조건 중 하나다. 무브먼트의 겉판에 ‘스위스의 호수’를 연상케 하는 물결 혹은 파도 무늬 장식을 넣는 것을 말한다. 무브먼트가 훤히 보이도록 디자인한 시계가 아니라면 시계 케이스 안에 숨어 있는 장식이다. ‘볼 수 없는 곳에 왜 공을 들이느냐’는 초보적인 질문에 매뉴팩처 총책임자인 이브 보르낭은 “최고급 시계 소비자는 보이지 않는 곳까지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무늬는 최고급 시계 브랜드가 각각의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도 쓰인다. 비슷해 보이는 물결 무늬지만 각각의 브랜드마다 물결의 휘어짐과 한 판에 들어가는 무늬 개수, 깎는 깊이까지 모두 다르다. 직선으로 장식하는 브랜드도 있다. 이 밖에도 시계 부품과 겉면 등을 다듬는 다양한 금속 깎기, 광택 내기 방법을 구사해 섬세한 장인정신을 나타내는 것도 고급 시계가 갖춰야 할 요소다.

예술과 결합한 기술

‘12P’ 무브먼트. 옆에서 본 모습이다. [피아제 제공]

‘고급 시계의 조건’을 이루는 또 하나의 숨은 특징은 ‘루비로 만든 나사’다.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마모가 덜 되는 루비의 특성상 여러 부품을 모아 조이는 부분에 루비 나사가 사용된다. 요즘은 공업용 합성 루비를 사용한다. 루비는 색도 아름다워 이 나사는 기능적인 용도에다 심미적 용도로도 쓰인다. 보르낭은 “루비 나사의 개수도 최고급 시계의 조건 중 하나”라며 “최고급 시계로 분류되려면 최소한 3~4개의 루비 나사가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무브먼트 조립에 쓰인 나사엔 붉은색 이외에 푸른색도 눈에 띄는데 1㎜ 안팎 크기여서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나사의 푸른색은 덧입힌 게 아니라 초고온에 금속을 달궈 순간적으로 산화시켜 얻은 것이다. 루비 나사와 조화를 이루는 푸른색은 나사 표면 온도 섭씨 약 290도에서 나타나는 색이다. 적정 온도보다 높으면 나사가 검게 변하고 낮으면 보라색과 비슷해져 루비 나사와 어울리는 조합이 어색해지므로 나사 하나의 색을 내는 과정도 일일이 장인들이 감독한다. 푸른 나사의 산화 과정에서 나사 표면에 얇게 생긴 막은 나사 구멍과 나사가 더 힘있게 결합하도록 돕는 기술적 역할도 한다.

3 20세기 초 스위스 라코토페에 있는 피아제 매뉴팩처에서 쓰이던 시계본과 디자인 스케치를 모아둔 상자.
4 ‘코트 드 주네브’가 디자인에 맞게 깎였는지 확대경으로 맞춰보는 작업.
5 시계의 실물 모형. 레진으로 만든다.
6 시계 장인이 사각형 무브먼트 ‘438P’의 나사를 조립 중이다. [피아제 제공]

실용성 없더라도 최고급 기술 위해서라면 …

‘알티플라노 젬셋 스켈레톤’의 무브먼트에 루비 나사를 올려놓는 장면이다. 핀셋으로 제자리에 놓은 다음 조인다. [피아제 제공]

‘사례1’의 주부 이씨가 헷갈려 하던 ‘투르비옹’은 최근 고급 시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언론에 꽤 소개된 최고급 시계 구성요소다. 무브먼트 속 부품 ‘스프링’이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아 생길 수 있는 시간 오차를 막는 장치다. 워낙 정교한 시계 기술을 요하는 부분이라 피아제 매뉴팩처에서도 투르비옹이 들어가는 시계는 경력이 오래된 장인들만 만들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굉장한 장치 같지만 실제 시계 기능에 기여하는 정도는 그리 크지 않다. 요즘은 스프링 만드는 기술이 워낙 좋아 투르비옹이 없는 시계에서도 시간 오차는 거의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 소비자들 사이에선 “브랜드들이 고급 시계 기술을 뽐내느라 투르비옹을 넣으면서 시계 값만 너무 올랐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손에 꼽히는 최고급 시계 브랜드에선 1000만원대 시계가 주를 이루는데 똑같은 제품에 투르비옹이 추가되면 대개 1억원을 호가한다.

시계 브랜드에선 시계조립공장을 ‘매뉴팩처’라 부른다. 영어 매뉴팩처는 일반적인 공장(factory)과 다르다. 수작업이 주로 이뤄지는 작업장이란 뜻에서 손을 뜻하는 ‘매뉴(manu)’가 붙었다. 전통적인 시계산업에서는 ‘오트 오를로제르’라 불리는 시계 장인이 수작업으로 시계를 만들어왔다. 시계 만들기의 첫 번째 작업은 모형 만들기다. 아무리 외형 디자인이 완벽해도 무브먼트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디자인은 폐기된다.

조용한 시골 ‘스위스 쥐라산맥=시계 밸리’ 된 까닭

쥐라 산맥에 자리 잡은 라코토페 마을 전경.

스위스 서북부, 프랑스·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산맥인 ‘쥐라’는 ‘시계 밸리’로 불린다. 지구 연대기 중 하나인 ‘쥐라기’의 어원이 된 이 산맥은 알프스 북부 지역, 제네바·로잔·베른 등을 굽어보고 있다. 레만 호수와 뇌샤텔 호수도 쥐라 산맥 아래 있다. ‘쥐라 산맥=시계 밸리’가 된 것은 라코토페에 자리 잡은 피아제를 비롯해 라쇼드퐁에 ‘매뉴팩처’를 둔 카르티에, 르브라시스에 자리 잡은 블랑팡, 라발레드주에 있는 예거 르쿨트르, 제네바에 있는 파텍 필립 등 쟁쟁한 시계 브랜드가 모두 쥐라 산맥을 따라 둥지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라코토페 피아제 매뉴팩처 총책임자인 이브 보르낭은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이 사람들을 진취적으로 만들긴 하지만 성격을 차분하게 하진 못한다”면서 “쥐라 산맥은 산이 완만하고 정적이어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시계 장인들에게 알맞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완만한 산세와 고요한 자연이 시계 장인들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는 “쥐라 산맥의 밝은 햇살도 시계 밸리의 핵심 요소”라고 설명했다. 요즘이야 조명 기술이 좋아서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 밸리가 처음 만들어졌던 18세기만 해도 정밀함을 요하는 시계 제조 작업에 자연 채광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보르낭은 “그러한 전통 때문에 대부분의 시계 매뉴팩처는 요즘도 커다란 유리창을 만들어 그쪽으로 작업대를 설치한다”고 말했다.

 보르낭은 쥐라 산맥이 시계 밸리가 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았다. “산골 마을이라 겨울이면 주민들이 할 일이 별로 없어 집 안에서 집중해 할 수 있는 작업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조용한 농한기를 보내기에 시계 조립 같은 세심한 작업이 안성맞춤이었다는 설명이다. “오르골(작은 상자에서 음악이 흘러 나오는 장치) 만들기가 쥐라 산맥을 따라 발달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보르낭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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