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골목길과 작은 건물은 숨쉬는 ‘도시의 세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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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길모퉁이 건축
김성홍 지음, 현암사
376쪽, 2만원

20세기 한국인은 꽤 성능이 좋은 ‘지우개’를 지니고 살아왔다. 실핏줄처럼 연결돼 있던 도시의 골목길을 깨끗하게 지워왔다. 동네 구멍가게 등 소규모 건물도 함께 쓸어냈다.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빌딩을 얹어놓고, 그게 도시 발전의 모범답안이라고 믿어왔다.

 『길모퉁이 건축』은 반전의 묘미가 있는 책이다. 소박하고 말랑말랑한 제목과 달리 우리 시대의 건축·도시에 대해 날 선 비판을 담고 있다. ‘작은 건축’ ‘낮은 도시’를 지향하는 지은이는 골목길과 작은 건축이 살아있는 곳에 한국 건축의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거대한 공룡블록으로 계획하고, 초고층 빌딩을 도시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관행은 전적으로 재고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길’과 ‘속도’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도시가 형성된 맥락을 설명한다. 유리가 발명된 뒤 쇼윈도를 내세운 상점이 만들어지고, 아케이드(유리로 덮은 길)와 백화점, 쇼핑몰로 이어지는 상점 건축의 진화과정은 결국 길과 건축이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상업건축을 도시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한 대목이기도 하다. ‘속도’ 역시 핵심 요소로 꼽았다. 자동차가 도시의 수평적 변화를 촉진했다면, 승강기는 수직적 변화의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길과 광장, 시장과 상점가, 공룡 블록과 골목길, 쇼핑몰과 초고층 빌딩 등이 겪은 변화의 흔적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지은이는 매력적인 도시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걷기에 좋은 곳이라는 것. 건물이 위압적이지 않고, 집과 가게들이 자연스럽게 길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했다.

 서울은 어떨까. 초고층 건물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도시의 중간 지대가 질식 당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전국 총 650만 개 건물 중에서 5층 이하의 건물이 97.5%를 차지할 만큼 소규모 건물이 많은데도, 초고층 건물에만 초점을 맞추어 도시 건축을 논해왔다고 지적했다. 정작 가장 보편적인 기능(주거와 상업), 가장 친근한 규모로 서 있는 건축의 매력과 가능성을 간과해왔다는 것이다. “도시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다. 우리가 수십 년간 지우려고 했던 중간지대에 그 답이 있다”(310쪽)고 했다.

 그 중간건축이 ‘길모퉁이 건축’이다. 복고·낭만의 건축이 아니라 진부함을 흔드는 혁신의 건축이다. 흔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도시의 세포’를 섬세하게 살리자는 것. 서울 홍익대 거리나 가로수길처럼 길과 닿아있는 건축, 문화가 살아있는 이면도로를 도시의 마당으로 살려내자는 제안이다.

 2년 전 『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을 썼던 지은이는 더욱 탄탄해진 콘텐트와 친근한 스토리텔링으로 돌아왔다. 공간과 도시의 역사에 대한 밀도 높은 조명, 집요한 문제의식, 현실적 대안이 균형을 이룬 또 하나의 역작이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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