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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상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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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친족끼리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한 것이 상피법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에는 대공복(大功服 : 아홉달복) 이상의 상복을 입는 본종(本宗 : 성과 본이 같은 친척)이나 사위, 손자사위, 손위·손아래 매부와 시마복(?麻服: 석달복) 이상의 상복을 입는 외가 사람들과 동서, 손위·손아래 처남 등은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정부(議政府)나 의금부(義禁府)·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문·무관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吏曹)·병조(兵曹) 등은 훨씬 엄격해 4촌 매부·4촌 동서까지 포함시켰다. 피고와 일정 관계가 있으면 재판관도 맡지 못했으며 거자(擧子 : 응시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으면 시관(試官 : 시험관)도 맡지 못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선종 9년(1092) 11월조에는 “오복(五服) 친족끼리 상피법을 정했다”고 밝혀 상피제가 1000년 이상 된 법임을 말해준다. 억울한 경우도 있었다. 이현보(李賢輔)가 쓴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공(李公) 묘지명』에 따르면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인 이중휘(李重輝)는 현종 시절 과천(果川) 현감으로 많은 공이 있었지만 감사와 상피관계라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정승도 상피법 적용 부서였지만 효종 1년(1650) 8월 좌의정 조익(趙翼)과 사돈인 이시백(李時白)이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청나라와의 관계를 들면서 “권도(權道 : 임시방편)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權宜之道, 似不可已)”고 편법으로 상피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이유원(李裕元)은 『춘명일사(春明逸史)』의 『대관은 상피하지 않는다(大官無相避)』라는 글에서 “이것이 곧 관례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효종 이후 의정부 정승들은 상피제에서 제외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홍봉한·홍인한 형제 정승이 안국동(安國洞)에 사는 것을 두고 “망국동(亡國洞)에 망정승(亡政丞)(『영조실록』 46년 3월 22일자)”이란 동요까지 생기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세도정치 때 상피제는 완전히 무력화되면서 부정부패는 일상사가 되었고 나라도 망했다. 관련 분야에 2년 이상 취직하지 못하게 한 법률 시행 직전 금감원 간부들이 대거 사임하고 금융회사로 향했다는 소식에 이어 공무원들이 대기업과 법무법인에 근무하던 근무휴직제가 중소기업에 국한된다는 소식이다. 상피제란 일종의 사회적 근친상간 금지법이다. 적용 대상을 확대할수록 사회는 맑아진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