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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이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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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K형, 혹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던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을 읽어봤는지? 만년 꼴찌 팀인 야구부의 매니저를 맡게 된 여고생이 우연히 접한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의 경영 이론으로 팀을 혁신한다는 줄거리지. 경영은 ①고객에서 출발해 ②조직원의 장점들을 생산으로 연결시켜서 ③새로운 차원의 고객 감동을 끌어내는 것이란 주제를 담았어. 이 소설을 읽다가 엉뚱한 상상에 빠지게 됐어. 만약 검찰총장이 드러커 책을 읽고 그의 원칙을 조직에 적용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내 상상 속에서 총장이 먼저 고민한 건 ‘검찰의 사업이란 무엇인가’였어.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이란 식의 딱딱한 규정은 답이 되지 못하지. 드러커는 “빤한 답이 옳은 경우는 없다”고 했으니까. 총장은 “진정한 마케팅은 ‘우리는 무엇을 팔고 싶은가?’가 아니라 ‘고객은 무엇을 사고 싶어 하는가?’를 묻는 것”이란 말을 떠올렸어. 파산 위기에 몰렸던 캐딜락이 “고객이 구입하는 건 운송 수단(승용차)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란 걸 깨닫고 성장 기업으로 변신했듯, 고객이 검찰에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에서부터 출발한 거지.

 “검찰에 원하는 거요?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서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 최근엔 그런 느낌이 없어요. 야당 쪽은 끌로 파고, 정권 주변의 의혹은 적당히 넘어가는 것 같은데….”(30대 회사원)

 “요즘 수사에선 거악에 맞서보겠다는 야성(野性)이 보이지 않아요. 주요 수사 라인에 말 잘 듣는 모범생들이 많은 것 아닌가. 그러다 보니 무죄 판결이다, FTA 유언비어다, 현안 있을 때마다 말이 앞서고….”(전직 검찰 간부)

 “수사를 하다 보면 위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를 보게 됩니다. 노무현 정부가 제도적으로 검찰권을 약화시켰다면, 이번 정부 들어서도 검찰이 칼 잡는 걸 경계하는 것 같아요. 내부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고.”(일선 검사)

 총장은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했어. 외부와 내부의 고객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일선을 믿고 수사의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내려보내야 한다는 것, 명분과 설득력이 뒷받침되는 수사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 총장은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인사의 공정성부터 확실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어. 그때였어. 검찰에 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건.

 K형, 꼭 이런 결론이 아니라도 좋아. 검찰이 국민을 진정 고객으로 여긴다면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아. ‘여의도 정치의 한 축’이란 비판에서 벗어나 국가 형벌권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무게감을 되찾을 수도 있고. 그런데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 하나는 드러커가 말한 ‘매니저(경영자)의 자질’, 즉 진지함에 관한 것이었어. 검찰총장이, 검사들이 검찰의 오늘과 내일을 얼마나 절실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