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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 2중대 민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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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장에서 출입문을 막은 뒤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회의실 내부 CCTV(폐쇄회로TV)를 신문지로 가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민주당 김영록 의원이 2일 외통위 회의실 문을 밖에서 못 열도록 공구로 잠금장치를 고정시키려 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1.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를 막기 위해 2일 오전 10시부터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장을 점거하고 있던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한 시간 뒤인 11시30분쯤 갑자기 부산해졌다.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지난달 31일에 이어 두 번째로 질서유지권을 발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민노당 강기갑·김선동·홍희덕 의원,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 무소속 조승수 의원 등은 회의실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채 의자 등 집기로 출입구를 막아버렸다. 이때 “‘저것’도 가립시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저것’은 의사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던 카메라였다. 그러자 강기갑 의원이 유원일 의원의 목말을 타고 손에 든 신문지로 카메라를 감싸기 시작했다.

  순간 국회 구내에서 외통위 상황을 중계하던 TV 화면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해버렸다. 잠시 후엔 아예 전원이 나가버려 한동안 구내 TV엔 화면조정을 알리는 ‘컬러바’(color bar)만 나왔다. 의원들이 회의장 안의 카메라를 가려 국회 생중계가 6시간 넘게 끊어지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민노당 의원들이 종이로 화면을 가리려는 모습을 봤는데 그 이후 이상이 생긴 것 같다. 아마 전원을 안에서 끊어버린 것 같다”고 추정했다.

 #2. 강기갑 의원 이 카메라를 가릴 때 이정희 대표는 회의장 한가운데 놓인 두 점의 도자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달 항아리’ 문양이 그려진 도자기는 지난 5월 윤태운 한국도예협회장이 직접 빚어 외통위에 기증한 것이다. 감정가만 개당 2000만원에 달한다. 남 위원장은 몸싸움을 억지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한복판에 고가의 기증품을 비치해뒀으나 ‘전면전’을 각오한 이 대표는 이 상징물을 치워버렸다. 그가 치운 건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더 이상 몸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신사협정’이었다.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가운데)이 2일 외통위 소회의실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한 뒤 야당 의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몸싸움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민주당 최규성·정동영 의원, 남 위원장, 민주당 유선호 의원, 민노당 곽정숙 의원, 민주당 김동철 의원. [최승식 기자]

‘야권의 맏형’이라 자임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그런 민노당 의원들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동영·유선호·최재성·최규성 의원 등 민주당 외통위원들과 당직자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외통위 전체회의장으로 들어갈 만한 곳은 모조리 차단했다. 국회 경위들이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자 몸싸움을 벌이며 맞서기도 했다. 소속 의원 전원에게 “ 외통위 회의장 근처로 집결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돌리기도 했다. 한나라당 이두아 원내대변인은 “한·미 FTA라는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제1야당인 민주당이 국민을 바라보지 않고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마치 민노당의 2중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단 6석에 불과한 ‘미니’ 정당이다. 반면 민주당 의석은 87석으로, 민노당의 열다섯 배쯤 된다. 그러나 정국 고비마다 민주당은 민노당에 끌려다니면서 수권능력을 의심받고 있다. 야권의 노선은 사실상 민노당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2일에도 한나라당의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처리를 막기 위해 민노당 의원들이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실을 점거하는 데 ‘찰떡공조’를 과시했다. 하지만 두 당의 생각이 같은 건 아니다. 민노당은 현재 한·미 FTA를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은 “우리는 ISD(투자자·국가 소송제도)만 없으면 FTA를 하자는 것”(김진표 원내대표)이라고 말한다.

남경필 외통위원장(왼쪽)이 2일 외통위 회의실 입구를 막고 있는 민노당 김선동 의원을 끌어내려고 의자를 잡는 바람에 김 의원이 뒤로 넘어가고 있다. 오른쪽부터 민노당 권영길·김선동·곽정숙·강기갑 의원.

민노당과 생각은 다르지만 야권통합 또는 공조를 위해 민노당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민주당의 현주소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는 “한·미 FTA는 야권연대의 핵심사항”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민주당 중도 성향 의원들은 속이 편치 않다. 김영환 의원은 “FTA는 4대 강 투쟁과는 다르다. 투쟁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철 의원이 정동영 최고위원을 가리켜 “정동영 민노당 의원이요?”라고 했던 것도 이런 불편한 기류를 대변한다는 지적이다. FTA 조건부 찬성론자인 송민순 의원은 아예 외통위에서 빠졌다.

‘민노당의 대(對) 민주당 우위’가 굳어진 건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해서다. 야권연대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소수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졌다. 민주당은 정책에서도 민노당의 영향을 받았다. 민주당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상급식 정책의 원조는 민노당이다. 민주당 복지공약인 ‘3+1(무상급식·의료·보육+반값등록금)’도 2002년 대선 당시 민노당 후보였던 권영길 의원의 대선공약이었다.

양당 간 ‘힘의 역전’은 선거정국에서 더욱 확실히 나타났다. 민주당은 지난 4·27 재·보선에서 텃밭인 전남 순천을 무공천하면서 민노당에 국회의석 하나를 ‘헌납’했다. 당 관계자는 “야권연대를 이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안에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번 10·26 재·보선에선 민노당의 존재감이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노당은 민주당과 단일화를 하지 않고 독자 후보를 냈다. 그 결과 72표차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됐다. 민주당 후보를 ‘질 수 있게 하는’ 실력을 과시한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소수파의 지분은 승패를 뒤바꿔놓을 수 있다. 1997년 대선 직전에 타결됐던 ‘DJP(김대중+김종필) 연대’가 그런 식이었다.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의석수는 각각 77석과 43석으로 2배 차이였다. 그럼에도 DJ와 JP가 약속한 지분율은 정확히 ‘50% 대 50%’였다. 그 때문에 98년 DJ 정부 첫 조각에서 자민련은 총리와 건교부 장관 등 5개 부처를 받아낼 수 있었다. 비록 자민련과의 공조로 집권에는 성공했으나 국민회의는 집권 후에도 자민련의 눈치를 봐야 했 다. 윤종빈(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민주당 입장에선 한나라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기 위해 선거국면에서 민노당에 계속 목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잃을 게 많은 민주당과 그 반대인 민노당의 입장 차이가 협상력의 차이를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철재·양원보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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