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⑭ “회사 살 수 있을까” 대신 “협력할 수 있을까”를 묻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사진 내 글자)

2006년 4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했다. 1조7500억 엔. 일본 인수합병(M&A) 사상 최고가 거래였다. 나는 이 딜을 1년 이상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5년 초 보다폰재팬 새 사장으로 빌 모로스가 부임했다. 바로 연락을 취해 사업 제휴를 이슈로 서서히 친분을 쌓았다. 그에게 인수 제안을 할 때도 “회사를 살 수 있을까요?”가 아니라 “우리가 협력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훗날 “손 회장의 민첩함과 정중함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단다.

소프트뱅크는 이 거래에 그룹 자산의 대부분을 걸었다. 그런 만큼 최고경영자(CEO)가 돼 직접 지휘봉을 잡기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애플의 스티브 잡스 CEO를 만났다. 그 무렵 미국 실리콘밸리엔 “애플이 MP3P인 ‘아이팟’ 내장 휴대전화기를 내놓을 것”이란 소문이 조금씩 퍼져가고 있었다. 나는 잡스와 만나 “그 사업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7개월 전, 이미 나와 잡스 사이엔 ‘아주 특별한 대화’가 오간 것이다. 그 두 달 뒤 나는 회사 이름을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바꿨다. 이어 모종의 ‘혁명’을 준비했다.

2006년 10월 일본에 번호이동제가 실시됐다. 자기 전화번호 그대로 가입 이동통신사를 바꿀 수 있는 제도다. 사람들은 “이제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시장 1, 2위 업체인 NTT도코모와 KDDI에 가입자를 모두 빼앗기게 됐다”고 수군댔다. 난 속으로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다. 우리 비밀무기는 일본인들이 이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파격적 할인요금제였다. 나는 여기 ‘화이트 플랜’이란 이름을 붙였다.

#‘폭탄할인제’ 정체된 시장을 뒤흔들다

 화이트 플랜의 핵심은 오전 1시부터 저녁9시까지 가입자 간 통화는 몽땅 무료라는 것이다. 2007년 1월 이 요금제를 출시하면서 나는 “경쟁업체들이 요금을 내릴 경우 24시간 안에 추가 할인제를 내놓겠다”고 큰소리쳤다. 업계에선 나를 숫제 상대도 않으려 했다. 그래서야 적자만 쌓일 뿐이라는 거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당시 나는 이미 음성통화만으로는 지속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다. 미래 핵심 수익원은 콘텐트 판매와 데이터 통신이 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가입자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또 모든 사업이 그렇듯 이동통신 또한 일정 수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해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었다.

 화이트 플랜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수년간 꼼짝도 않던 가입자 수 추이 그래프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번호이동제 와중에서 고객을 잃기는커녕 외려 성장의 전기를 마련했다. 1년 새 전체 가입자 수가 400만 명 가까이 늘었다. 그해 일본 이통시장 순증 가입자의 50%가 소프트뱅크 모바일로 몰렸다. 덕분에 모회사인 소프트뱅크는 2007년 상반기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했다. 언론도, 경쟁사도, 심지어 직원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경사는 또 있었다. 소프트뱅크가 33%의 지분을 보유한 중국 인터넷경매업체 알리바바닷컴이 홍콩 증시에 상장한 것이다. 알리바바닷컴에 투자한 돈은 20억 엔, 상장 뒤 33% 지분 평가액은 1조 엔이 넘었다. 당시 주가로 투자 대비 500배 이상의 수익을 거둔 거였다. 나는 전해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포브스 선정 일본 최대 갑부가 됐다. 2007년 5월 내 재산은 6960억 엔. 당시 환율로 약 5조5000억 원이었다.

#잡스와 나, 벚나무 아래서 맺은 우정

 그해 10월,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모든 휴대전화에 야후 검색 버튼이 탑재됐다. 이어 열린 실적 발표회장에서 나는 정식으로 천명했다. “이제 휴대전화는 음성 머신이 아닌 인터넷 머신이 될 겁니다. 인터넷에 강한 소프트뱅크가 이동통신 시장도 장악할 것입니다!”

 2008년, 하얗고 귀여운 개 ‘오토상’을 내세운 TV 광고가 대히트 하면서 회사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고객도 크게 늘었다. 사실 이동통신 시장에서 특정 회사 가입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만 해도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의 시장 점유율엔 수년째 큰 변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소프트뱅크 모바일의 가입자 수는 단 1분기도 정체되거나 뒷걸음질 없이 계속 증가했다. 그 해 6월, 우리는 또 하나의 ‘혁신 폭탄’을 준비했다. 애플 아이폰이었다.

 내가 스티브 잡스와 서로 마음 터놓는 사이가 된 건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잡스는 85년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그는 심기일전해 PC제조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3D그래픽업체 픽사까지 인수했지만 마음의 상처까지 모두 아문 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오라클 CEO 래리 앨리슨의 집에서 그와 만났다. 우리 셋은 벚꽃 만개한 뜰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앨리슨은 잡스를 가리키며 “이러다 애플이 도산할 것 같다. 부활할 방법은 단 하나, 저 천재를 귀환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삶과 비즈니스, 상실과 상처, 목표와 열정에 대한 대화와 공감 속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어갔다.

#아이폰은 내 꿈과 비전의 메신저

 앞서 밝혔듯 나와 잡스는 아이폰 출시 훨씬 전부터 ‘콘텐트와 휴대전화의 결합’이란 주제에 몰두해 있었다. 2007년 1월 애플의 첫 아이폰이 공개됐다. 난 기필코 그 제품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보다폰재팬을 인수할 때처럼 치밀하고 끈질긴 공략이 시작됐다. 잡스와의 친분은 기본, 난 우리가 열정과 비전을 공유하는 사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역시 결단. 경쟁사인 NTT도코모는 애플이 통화료 수입의 일부를 요구하자 난색을 표했다. 난 여봐란 듯 흔쾌히 응했다.

 아이폰은 그냥 휴대전화가 아니었다. 신세계를 향한 관문이었다. ‘손 안의 PC 세상’이란 내 꿈을 이뤄줄 최고의 파트너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폰 효과는 대단했다. 2008년 6월 아이폰을 출시하자 경쟁사 가입자들이 속속 옮겨왔다. 고객 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1인당 사용료도 증가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 사람들이 아이폰을 통해 데이터를 본격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상반기, 소프트뱅크는 다시 사상 최대 실적을 갱신했다. 전해 같은 기간에 비해 영업이익은 8%, 순이익은 무려 72%가 증가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럭저럭 40대의 마지막 승부도 무사히 끝나 가는군.”

정리=이나리 기자

◆화이트 플랜=소프트뱅크 모바일이 2007년 1월 내놓은 파격적 할인요금제. 기본료(98엔)가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일부 시간대를 빼고는 가입자 간 통화가 무료다. 6개월 만에 600만 가입자를 돌파하는 빅 히트를 쳤다.

◆오토상(おとうさん·사진)=소프트뱅크 모바일의 TV 광고에 등장하는 홋카이도산 개 ‘지로’의 별명. 오토상은 일본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광고 속 오토상은 말 그대로 한 가정의 가장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아들·딸과 산다. 오토상 외엔 모두 멀쩡한 인간, 그중 아들은 흑인이다. 광고 시리즈 후반부엔 오토상의 새아버지로 흑인 아들보다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이 광고는 ‘가족 가입자, 화이트 플랜 요금제 가입자끼리는 통화가 무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기획된 것이다. 나이·인종은 물론 ‘종족’도 상관없다는 파격적 발상이다. 2008년 처음 선보인 이 광고는 폭발적 화제몰이로 회사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오토상은 소프트뱅크의 상징 캐릭터가 됐다. 그릇부터 쿠션까지, 캐릭터 상품 인기도 대단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