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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비아 민속’ 통해 음악의 길 개척 노년엔 여제자 짝사랑하다 거절 당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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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호 27면

일제 때 독설의 문학평론가 김문집은 이상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이상의 작품쯤은 동경 문단에서는 여름철 맥고모자처럼 흔하다.” 솔직히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변경 예술인의 서러운 신세. 버르토크·코다이도 비슷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반도인’에게 모든 근사한 것은 일본 동경에 속해 있었듯이 헝가리 예술인에게 표준을 제시하는 우월한 강자는 독일이었다.

詩人의 음악 읽기 레오시 야나체크

밥집보다는 식당이, 식당보다는 레스토랑이 멋져 보이는 환경에서 시골 주막터 밥집의 가치를 찾아 다닌 사람이 바로 버르토크·코다이였다. 더욱이 그들은 전통과 과거에 머물지 않고 가장 현대적인 것과의 융합을 추구했고 그래서 위대해졌다. 독일을 추종하던 당대의 헝가리 음악가들은 흔적도 없건만 민속을 찾아가 독자적 길을 찾아낸 두 사람은 갈수록 빛난다.

사실 체코에 이미 선구자가 있었다. 버르토크보다 27살이나 연상인 레오시 야나체크(사진)다. 통상 ‘체코의 3대 작곡가’라 하여 스메타나·드보르자크와 함께 묶이지만 야나체크는 헝가리의 두 후배와 더불어 동유럽 또는 중부유럽 3인조로 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음악의 혁신성과 모더니티 때문이다. 모라비아 지방의 오래된 향토민요 연구가 야나체크에게는 자양이었는데 그 역시 향토성에 머물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작곡한 ‘무곡’ ‘목가’ ‘합창곡’ 등은 다소 지루하고 상투적인 면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생의 후반기 작품들은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처럼 강렬한 개성과 내면성을 보여준다.

슈캄파 4중주단이 연주한 ‘현악4중주 1, 2번’ 음반.

야나체크를 떠올리면 늘 입가에 웃음이 돈다. 눌려진 찐빵처럼 생겼는데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불우한 연애사건이 떠올라서다. 그의 나이 일흔 살 너머까지 수십 년간 순정을 바쳐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 10대 소녀 시절에 가르쳤던 여제자로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간 야나체크의 편지 공세, 애정 공세가 대단했다. 사랑하고 숭배하고 어쩌고…. 그녀는 어땠을까. 아빠처럼 아껴주는 다정한 스승이다.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존경받는 명사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편과 가정이 소중했고 짐작건대 눌린 찐빵 같은 할아버지 야나체크에게서 남자를 느끼기 힘들었던 것 같다.

스승 앞에서는 다정한 척했는지 모르지만 늘 남편과 주위사람에게 그 부담스러운 연정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태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어쨌거나 야나체크의 최대 걸작으로 꼽을 만한 현악4중주 제2번 ‘비밀편지’는 그런 배경으로 탄생했다.

‘비밀편지’의 작품 해석은 평론가들의 추론이 아니다. 야나체크는 음악의 리얼리스트를 자처한 터라 곡이 직접적인 말, 인생의 모습, 실제 감정의 구체적인 표현을 담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2번 못지않은, 음악적으로는 더 높이 평가받는 현악4중주 제1번도 그렇다. 작곡가가 직접 붙인 제목이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에 영감을 받아서’라고 돼 있다. 또 인생 말년의 걸작 오페라 ‘죽음의 집에서’는 도스토옙스키에 의한 작품이다.

야나체크는 러시아 문학광이었다. 그는 스스로 직접 겪고 느낀 것을 가능하면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배경이 명시된 곡들은 연애감정이든 소설 분위기든 찬찬히 유추하면서 들어보면 훨씬 흥미롭다.

입시 때 중점 요령이라든지 종합정리 같은 참고서가 있듯이 야나체크 음악을 한 방에 총정리하는 아주 훌륭한 교본이 있다. 고전문학을 벗어나 필독의 현대작가로 딱 한 명만 꼽는다면 누구를 들까. 나는 유감없이 체코 출신 밀란 쿤데라를, 작품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꼽겠다. 그 소설이 필립 코프먼에 의해 영화화됐는데 국내에는 엉뚱하게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영화 ‘프라하의 봄’ OST가 바로 야나체크 음악으로 구성됐다.

어찌 그리도 대목대목 에센스를 추려냈는지. 현악4중주 1, 2번도 요소요소 잘 추려냈고 장대한 피아노 모음집 ‘숲이 우거진 길’은 원곡보다 구성이 더 낫게 들린다. 독특한 바람둥이 이론을 갖고 사는 주인공 토머스가 죽음의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 그 잔잔한 피아노곡이 마치 영화를 위해 미리 작곡된 듯이 조화를 이룬다. 세상의 모든 다이제스트를 혐오하는 바지만 이 CD 한 장짜리 야나체크 다이제스트 본은 유감없이 강추다.

암만 해도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다. 칸타타 ‘사라져 버린 사내의 일기’, 오페라 ‘예누파’, 아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1905년 10월 1일 거리에서’가 있다. 몽땅 한마디로 말해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깊디 깊은 야나체크. 그리고 하나 더. 나이 들면 연애감정 절대 품지 말자. 야나체크처럼 망신만 당한다. 딴 데 가서 비웃고 흉보는 젊은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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