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B급 도시로 전락한 미국의 수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

남루한 행색의 흑인 청년은 20분째 줄 서 있었다. 로비 한가운데 설치된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차례가 왔다. 청년은 타인의 시선쯤이야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정적인 화면의 뮤직 비디오를 감상하며 몸을 흔들어댔다. 구인정보 신문을 손에 쥔 중년 여성이 청년 곁을 지나 열람실로 들어갔다.

 지난주 목요일 찾아간 워싱턴DC ‘마틴 루서 킹’ 도서관의 모습이다. 1972년 건립된 지상 4층, 지하 1층의 킹 도서관은 워싱턴DC가 운영하는 25개 시립 도서관 중 규모가 가장 큰 중앙 도서관이다. 유리와 철강에 깊은 애착을 보였던 세계적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유작이기도 하다. 2007년 미 역사보존협회는 이곳을 ‘역사적 이정표’(historic landmark)로 지정했다.

 멋진 건물 감상이 도서관을 찾은 이유가 아니었다.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시 당국이 10월을 기해 일요일엔 킹 도서관 문을 닫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는 도서관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워싱턴에서 일요일에 문 여는 도서관은 이곳이 유일했다. 다른 24개 도서관이 휴일에 문을 닫은 지는 이미 오래됐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이제 휴일에 주민들이 찾아갈 도서관이 없는 B급 도시로 전락하는 것이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한복판에 세워진 입간판이 보였다. ‘2011년 10월을 기해 일요일에 휴관합니다’. 모두들 그 글을 읽었다. 안내 데스크에 서 있는 지긋한 나이의 흑인 스콧은 “내가 일한 30여 년 동안 일시적 개·보수를 제외하곤 이런 일이 없었다”며 “주민들이 찾아와 ‘한두 시간만이라도 문을 열 수 없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가 전하는 일요일 킹 도서관의 풍경은 애처롭다. 오후가 되면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주변의 임시 보호소를 나와 도서관으로 몰려든다. 지하 회의실의 대형TV를 통해 미식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걱정 많은 그들도 이 순간만큼은 신나게 떠들고 박수 치며 그들만의 ‘유일한 미국 문화’를 즐긴다. 주중에는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하다가 일요일에 아이들 손을 잡고 도서관을 찾는 부모들의 사연도 들었다. 이제 그 사람들은 그 시각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시 당국은 첫 일요일 휴관을 이틀 앞두고 “추가 예산 3억여원을 확보해 내년 중반까지는 일요일에도 도서관 문을 열 수 있게 됐다”고 발표했다. 많은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미국 수도의 초라한 임시변통의 모습을 모두가 알아 버렸다. 과거 동네 곳곳에 자리 잡은 미국의 도서관은 선진 복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국가 부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지 부도’의 벼랑 끝 상황이라고 할까. 경제와 복지가 두 몸이 아님을 이보다 웅변해주는 것은 없다.

김정욱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