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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를 생각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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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요즘과 달리 개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개에 대한 내 기억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거나, 맨땅에 엎드려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는 하찮은 동물일 뿐이었다. 개 주인이 개밥을 챙겨주는 시간이면 모를까. 그 외에 아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린 내 눈에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던 황구는 외롭고 처량해 보였고, 늘 배고파하는 기색이었다. 어느 여름 날 밖에 나오니 아침부터 흘레 붙은 개들이 헐떡거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호기심에 들떠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아마 그 모습을 보며 음양의 이치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것 같다.

 황구는 본래 식성 취향이 그랬던 것인가. 어린아이가 눈 배설물에 코를 박고 핥아먹곤 했는데, 중간 중간에 다시 음미까지 하면서 먹어 개는 역시 개로구나 하며 내 어린 생각에도 황구는 천대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자연친화적’인 먹이사슬의 하나인 셈이고, 무슨 비난 받을 일도 아닌 것이다. 그렇긴 해도 그때 5~6세 나이의 내 의식수준은 그런 개와 비슷한 수준이었지 싶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장터에 가 개장국을 맛있게 먹었던 혀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후 나는 개는 닭이나 돼지처럼 똑같이 사람의 배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가축에 불과하다고 봤다. 해서 그 후로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즐겨 먹곤 했다.

 그런데 아마 중학교 2~3학년 무렵이었을 게다. 친척집에서 스피츠라는 흰 털의 예쁜 복슬강아지를 분양받았다. 집에서 그 개를 키우며 구름처럼 이는 애정을 품게 됐고, 개의 행복에 대한 주인의 의무 같은 것도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결국 나는 인간 종(種)은 절대로 개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개와 함께 지내다 보면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애니미즘’(예, 개도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각성시키기라도 하는지 그 무렵 간혹 강아지를 품에 안고 맑고 까만 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연상이 떠오른다. 내가 마치 개의 사촌형이라도 되는가. 개의 눈이 꼭 사람의 눈으로 착각되기도 했다. 그 개가 내 마음속을 환히 읽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도 온다. 이 녀석은 필경 전생에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어서 지금 같이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혹시 나도 개의 마음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그때의 그런 상념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면 개라는 동물에게는 다른 동물과 달리 특별한 교감이나 사랑의 능력 같은 게 있는 까닭으로만 보인다. 물론 개에 대한 그 모든 상념은 내 마음의 죄 없는 투사로 인한 결과다.

 요즘은 각종 애완견을 애지중지 키우는 세상이다. 인간적 소외로 개와 동화되려는 심리도 엿보인다. 때론 개 역시 사람과 동화되기를 바라는 눈빛들을 짓곤 한다. 개를 사람과 동일시 여겨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개는 인간의 진화를 위해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애견 옹호자는 애완동물이 없었다면 인간들은 인간성을 오래전에 마멸시켜버렸을 거라 호언도 했다. 고달픈 인간관계에서 어설프고 허망한 희망을 찾느니 차라리 변심을 모르는 개에게서 위안을 받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하나 21세기에 들어서도 전통식품 목록에 들어 있는 우리의 토종 황구의 신세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어 이젠 개에게도 신분 차별이 너무 큰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