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수려·예리한 글, 그의 펜끝 따라 미국이 움직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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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호 28면

역사적으로 혁명이나 정변에 의한 권력의 생성 과정엔 무력이 수반됐다. 그런데 근대 민주사회엔 물리력이 배제된 민선 권력과 함께 언론 권력이 출현했다. 글과 말 그리고 영상으로 언론은 20세기 초반부터 권력 세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최근엔 언론의 자매 격인 여론조사 권력까지 합세해 언론은 견고한 ‘특수 권력체’로 성장했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진보신문 뉴욕 타임스의 보수 논객 윌리엄 새파이어

오늘날 미국·프랑스·러시아 등 주요국 언론계엔 유대인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특히 미국엔 언론과 금융이 유대 권력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유대인 대다수는 리버럴하고 논리적이다. 또 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의 영향으로 강한 지적 호기심과 함께 풍부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 언론이 필요로 하는 적성을 모두 갖췄다.

유대인들이 미국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는 종사자 숫자를 기준으로 한 게 아니다. 미국의 신문·잡지·방송에 포진한 유대인은 전체 구성원의 6 %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은 영향력 있는 매체가 있는 뉴욕·LA·시카고·워싱턴DC 등 대도시에 모여 있다. 대도시엔 인구가 많고 또 정치·경제·문화 활동이 집중되므로 대도시에 기반을 둔 유대 언론인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특히 여론을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주필, 칼럼니스트, TV 뉴스쇼 제작자, 앵커, 토크쇼 사회자 등 요직을 차지하고 있어 소수 정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향력 있는 미국 유대 언론인 중 한 명을 뽑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상 인물이 넘치기 때문이다. 그중에도 오랫동안 미국 언론계에서 독보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 있다.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사진)다.

닉슨 vs 흐루쇼프 언쟁 계기로 발탁
새파이어는 1929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루마니아 유대인이다. 가계의 원래 성은 루마니아와 몰도바 지역 유대인에게 많은 사피르(Sapir)였지만 p를 f 로 바꾸고 끝에 e 자를 추가해 영어식 새파이어로 만든 것이다. 새파이어는 브롱크스 과학계 고교를 졸업한 다음 시러큐스 대학에 진학했지만 2년 후 자퇴하고 홍보대행업에 뛰어든다.

59년 7월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무역박람회에 참석한다. 박람회장에서 닉슨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유명한 ‘부엌 논쟁’(Kitchen Debate)을 벌인다. 닉슨은 흐루쇼프 면전에서 미국이 전시한 토스터 등 주방 기구를 예로 들며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뽐내고 상대를 약 올렸다. 분통이 터진 흐루쇼프는 닉슨과 삿대질이 오가는 언쟁을 벌였다. 당시 이 전시회의 홍보를 맡았던 새파이어는 두 사람이 논쟁하는 사진을 찍었다. 동서냉전의 상징물이 된 이 사진으로 보수 정치인 닉슨은 성가를 높였다. 닉슨은 유대인을 싫어했지만 새파이어에겐 호감을 가져 그를 60년과 68년 두 차례나 자신의 대선 캠프 홍보담당으로 합류시킨다. 68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파이어는 닉슨과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의 연설문 집필을 담당한다.

72년 닉슨 대통령이 연루된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새파이어는 73년 백악관을 떠나 뉴욕 타임스로 옮겨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78년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의 칼럼은 직설적이며 도발적이었다. 다만 명쾌한 분석과 수려한 문장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표현으로 정평이 있었다. 새파이어는 온건 보수주의자를 자처했지만 실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네오콘이 주도한 아프간·이라크 전쟁을 적극 성원했다. 새파이어는 빌 클린턴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부인 힐러리 여사에 대해선 ‘태생적 거짓말쟁이’라고 독설을 퍼부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도 글을 썼다. 새파이어는 그의 고정 칼럼 ‘온 랭귀지’(On Language)를 통해 영어 단어와 문장에 관한 탁월한 언어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칼럼에서 외모지상주의를 비하하는 표현인 ‘루키즘’(Lookism)이라는 유명한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칼럼 하나로 국방장관 내정자 낙마시켜
새파이어는 열렬한 친이스라엘 인사였다. 93년 12월 클린턴 대통령은 해군 제독 출신으로 국방부 안보국장과 CIA 부국장을 지낸 보비 인맨을 국방장관에 내정했다. 민주·공화 양당 모두 안보·군사정보 최고 전문가인 인맨의 기용을 환영했다. 그러자 새파이어는 인맨의 내정을 반박하는 4개 항의 부적격 사유를 자신의 뉴욕 타임스 칼럼에 열거했다. 이 중엔 인맨의 반이스라엘 정서가 가장 커다란 결격 사유로 지적됐다. 이 칼럼이 나온 후 인맨은 스스로 사퇴했다. 언론인 새파이어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사례다.

새파이어는 2005년 1월 뉴욕 타임스에서 퇴직했다. 그리고 2006년 9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 평론가 새파이어의 발자취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분분하다. 그렇지만 그의 예리한 언어감각에 대해서만은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새파이어는 진보지 뉴욕 타임스에서 보수적인 글을 썼다. 우리 언론계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우리 보수지엔 진보 성향 필진의 참여가 거의 없다. 또 진보매체엔 보수 인사의 글을 볼 수 없다. 심한 낯 가림에 의한 편 가르기다. 그런데 오늘날 다원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 독자는 이념적 스펙트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다 다양하고 균형 있는 볼거리를 원한다. 유대계 매체인 뉴욕 타임스는 간판 논조에 집착하지 않고 보수 논객 새파이어를 활용해 보수 성향 독자층도 유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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