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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에 누워있던 딸 내게 진실 밝혀달라 말하는 것 같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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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슬픔조차 그에겐 사치였다. 진실만이 딸의 원혼(怨魂)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삭의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피해자인 박모(29)씨의 아버지 박창옥(58)씨 얘기다. 그는 16일 서울 여의도 자신의 형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형량은 상관없다. 진실이 밝혀진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법원은 15일 피해자의 남편인 백모(31)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었다. 사건이 발생했던 지난 1월 14일 이후 8개월째 시신안치소(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누워있는 딸의 장례식도 치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딸이 타살됐다고 생각한 계기는.

 “출산을 한 달 앞둔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딸네 집으로 달려갔다. 먼저 사위를 끌어안고 ‘얼마나 힘드냐’고 위로했다. 그런데 욕조에 누워있는 딸의 자세를 본 순간 ‘정말 이상하다’는 느낌이 있었고, 딸아이가 ‘진실을 밝혀달라’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사위의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다.”

 박씨는 “사위가 사건 직후 바로 용서를 구했다면 모든 걸 덮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사위가 변호사와 함께 나타나는 걸 보고 딸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경찰 및 검찰의 수사와 법원 재판 과정에서 딸의 죽은 모습이 담긴 수사기록을 여러 차례 다시 봐야 했다.

 -사건 발생 이후 유죄 선고까지 8개월이나 걸렸다. 지금까지 버텨온 힘은.

 “강하게 버텨내 진실을 밝히는 게 부모의 도리이고, 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위 백씨는 유죄 선고 이후에도 항소하겠다고 밝히는 등 계속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딸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이 사위의 태도였다. 아들 같은 사위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죽었는데 냉정했다. ”

 박씨는 사위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만약 사위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한다면 받아들이고 싶다”며 “세상을 살다보면 어려운 상황이 오는데, (사위가) 강한 인내심을 갖고 세상을 넓게 보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늘로 간 딸은 1남 2녀 중 첫째였다. 박씨는 아들보다 딸을 애틋하게 키웠다. 딸은 커서 시집을 가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출가외인’이라서 그랬다고 했다. 곱게 키운 딸은 6년 연애 끝에 의사 남편과 결혼했다. 마냥 어린애 같던 딸은 지난 봄, 임신을 했다. 배 속의 아기가 자라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버지는 행복했다.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그 딸을 안을 수 없다. 사랑한단 말도 전할 수 없다.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이번 일로 딸과 사위를 모두 잃었다. 죽은 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냥 혼자 마음속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영혼이라도 아빠의 말을 듣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내세(來世)가 있다면 그곳에선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건 현장과 경찰 수사, 다섯 번의 재판 과정을 담담히 지켜봤던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딸이 제일 보고 싶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고개를 떨궜다. 박씨는 인터뷰를 멈추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눈물을 훔치고 돌아왔다. 8개월을 참았던 아픔이었다.

 “명절 때가 제일 보고 싶다. 설, 추석 때면 친정에 왔었다. 벌써 딸이 가고 나서 두 번의 명절을 지냈다. 이제는 딸이 마음 편하게 떠났으면 좋겠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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