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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눈앞의 회색 충격 … 100세 시대 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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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15일 100세 시대에 대비해 국가정책의 틀을 질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 장관은 “육십 평생이란 말은 100세 평생으로 바뀔 것”이라며 “생애 주기가 길어진 만큼 삶의 방식과 사회시스템, 국가정책의 틀도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연말까지 100세 사회에 대비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할 움직임이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정부 차원의 100세 사회 대비책은 늦은 감이 있다. 이미 민간 금융회사들은 ‘100세 시대 연구소’ ‘은퇴설계연구소’ 등을 발 빠르게 세우고 있다.

 현재 한국의 기대수명은 1971년생 남성의 경우 절반이 94세까지 살고, 같은 해 태어난 여성은 절반이 96세를 넘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100세 시대’가 코앞에 닥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수(長壽)는 축복이었다. 하지만 100세 시대가 박두하면서 국민들의 의식도 급변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0~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3.3%가 90~100세까지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했다. 반면 축복이라는 답변은 28.7%에 그쳤다. 100세 시대가 재앙일지 모른다는 우울한 자기진단이다.

 100세 시대는 과학과 의학의 진보가 가져다 준 선물이지만 사람에 따라 끔찍한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운 좋게 60세에 퇴직해도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적당한 경제력과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이 신산(辛酸)한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이 없다면 누구든 고독한 말년을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100세 시대는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수반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는 평균 수명 80세를 기준으로 설계돼 있다. 평균 수명은 연장되고 있는데 그 이후의 안전한 노후 대책이 전혀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기에다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퇴장과 함께 재정파탄·노인 빈곤·노인 자살·세대 갈등 같은 대형 사회 문제들을 예고하고 있다. 오죽하면 99세까지 팔팔(88)하게 살다가 2~3일 앓은 뒤 죽었으면(4) 좋겠다는 ‘9988234’란 유행어가 나왔을까.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보다 한발 앞서 100세 시대를 맞은 선진국들은 노인을 ‘사회적 자산’으로 인식하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그레이(grey) 쇼크를 행복한 실버 사회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선진 사회에선 장수는 축복이며 단지 대가를 지불할 뿐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도 역동적인 100세 시대를 맞으려면 우리 사회의 노인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고 국가와 정책의 틀도 완전히 손질해야 한다. 처량하고 서글픈 회색 이미지를 지우고, 지혜와 경험을 갖춘 노인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농업혁명·산업혁명·정보기술(IT) 혁명에 이어 유쾌한 실버 혁명을 일으키는 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