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따뜻한 영웅" - 이연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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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생각 하나. 그 많던 홍콩 영화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영화사에도 없던 '홍콩 느와르'라는, 독특한 장르를 구축했던 홍콩 영화. 한때 비디오 대여점의 3분의 1이상을 점령했던 홍콩 영화의 위력을 이제는 헐리웃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이는 홍콩반환이라는, 세기말적 이벤트를 시작으로 영화계 인력들이 속속 홍콩 탈출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헐리웃으로 진출한 인물들은 '오우삼'을 비롯한 감독들만이 아니다. '성룡'과 '주윤발', '양자경'등도 헐리웃행에 몸을 실었으며 '이연걸' 또한 헐리웃행 비행기를 탔다.

'성룡'이 10년 이상 헐리웃을 기웃거렸지만 쉽지 않았듯이 '이연걸'의 성공을 점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언어는 둘째 치고라도 모든 문화적 기반이 그의 성장 배경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연걸'은 생각보다 영악한(?) 방법으로 헐리웃에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리쎌웨폰4〉에서 거의 대사 없이 눈빛과 액션 시퀀스만으로 캐릭터를 소화해 낸 것이다. 아시아 팬들의 실망은 컸지만 헐리웃은 열광했다.

'이연걸'의 본명은 '이양중'(영어 이름은 Jet Li). 63년 중국 북경 출신이다. 남달리 운동신경이 발달해 무술을 익히기 시작했으며 북경체육학교에 입학해 진짜 중국전통무술을 익혔다. 10살 때는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이듬해 중국전국무술대회(중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대회)에 출전, 권법, 봉술, 검술 3개 분야에서 대회 사상 최연소 우승을 기록했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소림사(少林寺)〉. '이소룡' 사망이후 정통 액션 스타가 절실했던 홍콩 영화계와 관객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성룡'의 코믹 액션과 '주윤발'을 앞세운 '강호의리파' 영화들이 발전하는 동안 '이연걸'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 했다.

그를 다시 부활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홍콩영화계의 아이디어 뱅크 '서극'. 중국 근대사의 신화적 무술인인 '황비홍'역에 '이연걸'을 캐스팅한 것이다. '이연걸'은 〈황비홍〉으로 다시 한번 그의 시대를 열었다. 〈황비홍〉 시리즈와 〈동방불패〉등을 함께 작업한 '서극' 감독은 '이연걸이야말로 진짜 중국무술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 평했다. 〈황비홍〉시리즈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긴 했지만 이후 출연작은 멍청할 만큼 단순했다. 최대의 실패작은 〈이연걸의 탈출〉과 〈모험왕〉. 실패의 원인은 홍콩 특유의 코믹 영화에 어설픈 '이연걸'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헐리웃에 그의 이름을 알린 최초의 영화는 96년작 〈흑협〉이다. 이 영화가 미국에 수출되면 대역없이 액션 연기를 선보인 '이연걸'에게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이후 태평양을 건너 헐리웃에 진출, 첫 영화 〈리쎌웨폰4〉에서 중국 범죄조직 두목 와 싱 쿠(Wa Sing Ku)역을 맡아 강력한 악당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리쎌웨폰4〉는 '이연걸'에게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는데 하나는 첫 번째 헐리웃 영화라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최초의 악역이었다는 것이다.

첫 주연작은 〈로미오 머스트 다이〉. 홍콩식 고난도 액션 영화인 〈로미오 머스트 다이〉는 젊은 관객을 겨냥한 영화답게 매우 빠르고 역동적이다.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빌려왔으며 여기에 현란한 액션을 가미했다. 그리고 '알리야', 'DMX' 등 힙합 톱스타들의 음악과 어우러지면서 개봉 3주만에 제작비의 두배 가량인 5천만달러 수익을 올렸다

'이연걸'은 홍콩 최초의 슈퍼스타이자 헐리웃 스타였던 '이소룡'이나 코믹 액션의 달인 '성룡'과는 사뭇 다르다. '이소룡'이 다소 허무적이며 고독한 영웅이었다면 '이연걸'은 맑고 따뜻한 영웅으로 팬들에게 어필한 것이다. '이소룡'이 힘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무술이라면 '이연걸'은 신체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연걸'은 연기는 10년전이나 지금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의 '진짜 액션'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한때 경찰역으로 자주 등장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6.4사건(천안문사태) 이후 홍콩인들의 머리 속에는 중국경찰이나 공무원들은 나쁜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중국에도 의로운 경찰이 있다고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중국무술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장 큰 의미다" 과연 영웅 '이연걸'다운 생각이다.

※ 필자 조은성씨는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의 조감독을 거쳐 EBS 교육방송 〈시네마 천국〉구성작가, 나우누리 영화동호회 시삽으로 활동, 현재는 인터넷 업체에서 영화컨텐츠팀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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