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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안철수 바람과 민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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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바람이 무척 거세다. 바람의 세기를 보나 진원지를 보나 아무래도 그냥 스쳐 지나갈 바람 같지는 않다. 그저 한때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가능성을 내비쳤던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은 서울시장이 아니라 유력한 대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 거센 바람에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모두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바람을 피해 잠시라도 숨을 수 있는 박근혜라는 언덕이 있는 한나라당에 비해, 허허벌판에 서서 이 거센 바람 앞에 사지를 송두리째 내어놓을 수밖에 없는 민주당의 처지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안철수의 부상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내 다른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손학규 대표의 지지율조차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민주당 내에서 거론되는 서울시장 후보에 대해서도 유권자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작년 지방선거와 얼마 전 재·보궐 선거에서 기세를 올렸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이명박 정부에 등 돌리고 한나라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결국에는 ‘자연스럽게’ 민주당 지지로 몰려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예기치 못한 현상은 물론 도덕성, 공익 우선, 상식의 정치 등을 강조해온 안철수라는 인물의 개인적 자질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 바람의 뒤에는 보다 구조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정당 구도는 근원적으로는 민주화 직후의 대선과 총선을 통해 등장한 지역주의 4당 구조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1990년 1월의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정당체계가 현 정치 질서의 보다 직접적인 기원일 것이다. 3당 합당으로 비(非)호남 대 호남 대립 구도가 형성되면서, 지역적으로 고립될 처지에 놓인 김대중(DJ)은 이때 진보적인 재야진영을 끌어들여 지역적 색채를 희석시키고 이념적인 색채를 보완했다. 그 뒤 김영삼 정부 때 김종필이 민자당에서 탈당하면서 오늘날의 정당 구도가 완성되었다. 이후 한국 정당 정치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 갈등을 기본으로 하면서, 거기에 보수-진보의 이념 갈등이 가미된 특성을 보여 왔다. 정당 간 이념적 차별성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추진과 함께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안철수 바람이 흥미로운 것은 지난 20년간 큰 변화 없이 현 정당 구도가 규정해 오던, 이와 같은 정치적 특성이 부정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바람 속에는 단순히 한나라당이 싫다, 혹은 민주당이 안 끌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전통적인 정당 경쟁의 축이었던 보수 대 진보의 이념 대립이나 영남 대 호남의 지역 대립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안 원장은 부산 출신이지만 그 지역의 지배정당인 한나라당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민주당에 친근감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념적으로도 그 스스로 안보에는 보수적, 경제에는 진보적이라고 밝혔다. 이런 ‘애매한’ 태도는 지금까지 정당 정치를 규정했던 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 대립과 이념 갈등을 부추기며 지지층을 볼모로 삼아온 기존 정치권에 식상했던 유권자들은 이런 모습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의 가능성을 찾았다. 3당 합당 이후의 정당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에 대한 요구가 거센 바람을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기존의 틀을 깨뜨려 버리지 못하면 기존 정당들이 살아남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민주당은 그동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자 상징이었던 DJ를 창조적으로 극복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DJ는 독재와 냉전 이데올로기에 도전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이제 유권자들은 그가 설정했던 과거의 정치적 질서를 넘어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이 지닌 기득권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는 물론 한나라당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 비해 기댈 언덕조차 없는 민주당으로서는 이런 자기부정과 혁신이 더욱 절박하고 중요해 보인다. 보수당과 굳건한 양당 체제를 유지해 오던 영국 자유당이 시대적 흐름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노동당에 밀려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역사적 경험을 민주당이 한번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연 민주당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바람의 끝이 궁금한 까닭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