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잉여’들의 천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잉어가 아니다. 잉여(剩餘)다. ‘다 쓰고 난 나머지’라는 뜻인데, 요즘 인터넷에선 대략 ‘쓸모없는, 남아도는’이란 의미로 쓰인다. 잉여짓은 쓸데없는 행위를 칭하며, 잉여력이란 그 짓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포털사이트 야후에 따르면 잉여는 지난해 네티즌이 두 번째로 많이 쓴 신조어였다. 1위는 ‘진짜’를 뜻하는 ‘레알(real)’이었다.

 각설하고, 우리 사이버 생태계엔 자타가 공인하는 잉여계의 제왕이 있다. ‘디시인사이드(디시)’ 창업자 김유식(41)씨다. 디시는 김씨가 1999년 만든 우리나라의 대표적 온라인 커뮤니티다. 애초 디지털카메라 쇼핑몰로 시작한 것이 언젠가부터 온갖 유행어와 화제 인물, 이슈를 양산하는 인터넷 하위문화의 메카가 됐다. 디시를 모르는 이들도 폐인이니 댓글놀이, 갤러리, 짤방(짤림방지), 개드립(기발한 말장난), 병맛(어이없고 맥락 없음) 같은 이곳 태생 유행어들을 한두 개씩은 알고 있을 게다.

 김씨의 삶은 잉여짓의 전범과 같다. 학창 시절엔 게임과 무협지에 빠졌다. 덕분에 일본어를 마스터했다. 대학 진학 대신 PC통신에 웃기는 글을 올리다 유명인사가 됐다. 인터넷의 힘에 눈떠 온라인 전자기기 판매로 떼돈을 벌었다. 일본 유학을 갔지만 수업은 뒷전, 한·일 통신 판매로 더 큰 부를 쌓았다. 뭣도 모르고 성인 비디오 한 장을 대리구매해줬다가 구치소 생활을 했다. 얼마 뒤엔 PC통신에 “강릉 무장 잠수함 사건은 정부 조작 아닐까?”라는 글을 올렸다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이때 경험을 코믹 버전으로 바꿔 하이텔에 연재해 또 대박을 쳤다. 영국으로 도망치듯 가서는 일본 문화를 다룬 책 몇 권을 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역시 재미 반, 사업 반 시작한 디시까지 뜨면서 그는 한때 인터넷 시대를 대표하는 유망 벤처기업인이 됐다.

 이런 그가 얼마 전 또 ‘빵’에 다녀왔다. 기업 합병 브로커들에 잘못 걸려 이리저리 끌려다닌 끝에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된 것. 지난해 초 출소한 그는 최근 또 그 스토리를 담은 책 『개드립 파라다이스』를 펴내 “역시 유식대장답다”는 찬사(?)를 들었다.

 어떤 이들에게 이런 김씨 스토리와 그가 일군 디시 문화는 말 그대로 쓸모없는, 비생산적 헛짓거리일지 모른다. 실제 디시는 악플러들의 온상, 천박한 ‘병맛’ 폐인문화의 진원지로 꼽힌다. 그렇더라도 이 사이트가 “놀이부터 정치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독특한 한국 네티즌만의 문화 형성지 역할을 해온 것”(민경배 경희사이버대 교수)은 사실이다.

 무릇 문화란 예부터 ‘잉여’의 산물이었다. 밴드 ‘십센티’, 가수 장기하의 히트음반을 제작한 고건혁씨는 “음악인의 창의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페이스북 또한 여학생 인기투표 사이트 제작에 골몰한 마크 저커버그 창업자의 잉여짓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내 아이가, 내 직원이 뭔가 쓸모없어 뵈는 일에 몰두한다고 무조건 나무랄 일은 아니다. 구글에는 “업무 시간의 20%는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규칙도 있지 않은가.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