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 이후 활동 왕성, 93년 코소보 사태 이후 내리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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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14면

유엔 안보리 회의실은 노르웨이룸이라고 불린다. 유엔 출범 당시 노르웨이가 공사와 인테리어를 무료로 해줬기 때문이다. 그림은 노르웨이 화가 퍼 크로그의 ‘불사조’다. 그러나 신선한 이름과 달리 회의실에선 상임이사국들을 중심으로 지루한 공방이 이어진다. 그래서 2005년부터 안보리 개혁 요구가 커졌지만 이 역시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블룸버그 뉴스]

2010년 6월 1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 2층 안보리 회의장. 늦은 시간이었지만 회의장 불은 여전히 밝았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향하던 국제구호선을 공격해 승선자 10여 명이 사망한 사건 발생 직후 긴급 소집된 회의였다. 자국인이 희생된 터키는 긴급 회의 소집을 요청하면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의장성명 채택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반발로 회의는 늘어졌다. 12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의장성명이 채택됐지만 이스라엘 이름은 빠졌다. “민간인을 최소 10명 숨지게 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낸 행위”라고만 언급됐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이 습관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꼬집었다.

개혁 요구 목소리 커지는 유엔 안보리

안보리 내 ‘밀고 당기기’의 단면이다. 안보리의 모든 결정은 이처럼 각축전의 산물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안보리는 유엔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안보리는 15개국으로 구성되지만 핵심 권력은 P5라고 불리는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러시아 등 5개 상임이사국에 있다. 권력의 원천은 거부권이다. P5 가운데 한 나라라도 거부하면 안보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나머지 10개 나라는 비상임이사국이다. 대륙별로 안배해 총회에서 선출되고 임기는 2년, 거부권도 없다. 그러나 비상임이라도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은 1996~97년 비상임이사국을 했는데 당시의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는 “비상임이사국이 되자마자 미국부터 이라크까지 세계 각국의 면담 요청이 쇄도했다”며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 된다는 건 한국 외교 브랜드가 격상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안보리는 탈냉전 이후 활동이 왕성해졌다. 45년 유엔 창설 이후 89년까지 안보리를 통과한 결의안은 646건. 부결은 196건이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에는 2007년까지 1136건이 통과되고 20건만 부결됐다. 국제분쟁에 대한 유엔의 PKO활동도 89년까지는 18건이었지만 탈냉전 이후 2007년까지 45건으로 치솟았다. 이처럼 유엔의 활동이 왕성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국방대 김열수 교수는 2008년 자신의 논문 ‘탈냉전 후 유엔 안보리의 위상 변화’에서 ‘안보리의 위상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탈냉전 뒤 강대국 간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안보리는 분쟁 해결의 중심이 됐다. 안보리는 탈냉전 분위기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철수(88년) ▶앙골라에서의 쿠바군 철수(89년) 감시뿐 아니라 이라크 전쟁 이후 이라크ㆍ쿠웨이트 간의 정전 감시, 모잠비크 정전 감시, 그루지야-압하스 자치주 간의 정전 감시 등 다양하게 활동했다.

김 교수는 “그러다 93년부터 위상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소말리아와 옛 유고, 르완다에서 유엔의 개입이 실패하면서 서방은 각개전투로 나섰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다국적군을 보냈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발칸 사태에 개입했다. 프랑스는 르완다에 다국적군을 보냈다. 모두 유엔 안보리 결의 없이 나섰다. 그 뒤에는 상임이사국의 문제가 있었다. 나토의 발칸 개입은 러시아가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결의안을 안보리에 회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99년 분쟁이 끝나자 유엔은 나토의 손을 들어줬다. 안보리 결의안도 없는 공격은 불법이었지만 이를 추인해 안보리는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도 안보리를 무시하고 시작됐지만 나중에 이라크 통치를 위해 유엔에 손을 벌렸다. 미국과 러시아만 아니다.

중국도 한몫한다. 수단의 내전 결의안을 마련하는 데 중국의 반대로 4년이나 지연됐다. 지난 7월까지 주유엔 대사를 지낸 박인국 전 대사는 최근 안보리의 주목할 만한 동향으로 중국의 적극성을 들었다. “예전엔 침묵했지만 요즘엔 팔레스타인ㆍ이란ㆍ아프리카 같은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려 한다”며 “중국은 미국과 공개 석상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점을 들었다.

이처럼 ‘P5의 문제’ 때문에 ‘안보리가 회원국의 이익을 반영하는 기구’라고 하는 예전의 칭송이 ‘강대국이나 패권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 동원하는 기구’라는 비판 목소리에 조금씩 눌려 간다. 이런 논쟁은 안보리 개혁으로 이어지며 최근 뜨거운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2005년 4월 11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루스벨트 호텔 행사장. ‘G4’로 불리는 일본ㆍ독일ㆍ브라질ㆍ인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합의를 위한 연대(UFC)’ 모임이 열렸다. UFC 주도국은 한국ㆍ이탈리아ㆍ파키스탄ㆍ멕시코 등 10여 개 중견국가. 이날 ‘반G4 행사’에는 이탈리아의 지안 프랑코 피니 외무장관, 한국의 천영우 당시 외교부 외교정책실장을 비롯해 119개 국가 및 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2005년 안보리는 ‘G4 대 UFC’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내진은 진행 중이다. 그 뒤에는 안보리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갈등이 있다.

선문대 박흥순(국제관계학·유엔체제학회장) 교수는 “90년대부터 안보리 개혁은 꾸준히 제기되어온 해묵은 과제”라고 말했다. 이 의제를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공식 의제로 만들었다. 박 교수는 “2기 임기를 시작한 아난 총장이 안보리 개혁을 자신의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의욕을 갖고 저명인사 16인으로 패널을 만들어 2004년 말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A안은 상임이사국을 6개로 늘리는 것, B안은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 중간에 준상임이사국을 8개 두고 연임이 가능한 4년 임기를 부여해 상임이사국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P5는 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자격으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얻었고 유엔 헌장을 통해 영속적으로 보장받았다. 이후 안보리 구성은 65년 단 한 번 바뀌었다. 그것도 비상임이사국만 6개에서 10개국으로 늘어난 것뿐이다.

G4는 2005년 5월 G4 국가와 아프리카 대륙을 대표하는 2개 국가에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부여하되 거부권은 향후 15년간 갖지 못하게 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기득권 침해를 원치 않은 P5, 특히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눈엣가시로 여긴 중국의 반대로 벽을 못 넘었다. 여기에 한국ㆍ멕시코ㆍ이탈리아ㆍ스페인ㆍ아르헨티나ㆍ파키스탄 등이 속한 UFC도 반대 캠페인을 펼쳤다.

95~97년 유엔 근무를 했던 박수길 전 대사는 “당시 항상 의기투합했던 이탈리아ㆍ파키스탄 측 대사들과 뉴욕 맨해튼 커피숍에서 만나 결성했기 때문에 UFC는 ‘커피클럽’이라고도 불렸다”며 “안보리는 유엔의 심장부이면서도 유엔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극적으로 표면화되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박인국 전 대사는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겹자물쇠처럼 안보리 개혁 논의를 막고 있다”며 “아이가 훌쩍 컸는데도 어렸을 때 옷을 입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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