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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서래섬과 세빛둥둥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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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서울 한강의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서래섬이란 작은 섬이 있다. 1972년 한강에 제방을 쌓기 전 이 일대 모랫벌을 강물이 서리서리 빙 둘러 감싸 돈다 해 ‘서릿개’라 불렀고 이를 ‘반포(蟠浦)’라고 썼다. ‘서래마을’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고 ‘반포’라는 지명 역시 예서 기원했는데 다만 한자 표기만큼은 홍수 때 상습적으로 침수되기에 소반 혹은 대야라는 뜻이 담긴 ‘반포(盤浦)’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후 86년 한강 종합개발 때 이 모래벌판인 서릿개 양편으로 확연히 물길을 내 아예 인공 섬으로 만들었다. 그게 오늘의 서래섬이다.

 # 섬 둘레를 천천히 걸어 도는 데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 아주 작은 섬인 서래섬은 집중호우가 내려 한강물이 불어나면 으레 사라진다.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아주 묘한 섬이다. 지난 주말 늦은 오후에 찾아간 서래섬은 잠수했다 물 밖으로 올라온 잠수함처럼 여기저기 물에 잠겼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낚시에 여념이 없는 강태공들과 산책 나온 이들, 그리고 쌍쌍이 데이트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서래섬은 살아 있었다.

 # 그 서래섬에서 직선거리로 채 500m도 안 되는 곳에 세빛둥둥섬이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야심 차게 추진한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꽃이라고 해야 할 것임에도 어찌 된 일인지 불조차 꺼진 채 아예 사람들 출입마저 막고 있었다. 왜 통제하느냐고 묻자 “안전사고가 날까 봐!”라고 대답했다. 한강 둔치와 세빛둥둥섬을 잇는 도교(渡橋)의 부실 논란은 누차 있어 왔고 지난번 집중호우 때 현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울시에서 25년짜리 사업권을 따낸 시행사(플로섬)와 실제 이곳 운영을 맡은 업체(CR101) 사이에 이견과 갈등마저 불거져 계약 자체가 깨지고 컨벤션센터와 레스토랑 등 내부 공사도 중단됐다. 서울시는 민간업자들 사이의 문제여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며 수수방관했다. 결국 민간자본 964억원짜리 세빛둥둥섬은 ‘낙동강 오리알’, 아니 ‘한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말이 민간자본이지 964억원의 29.9% 지분은 서울시 산하 SH공사에서 나갔다. 여기에 한강 르네상스의 마스터 디자이너 격인 오세훈 시장마저 없으니 자칫 한강에 떠 있어야 할 세빛둥둥섬이 공중에 떠버릴 판이다.

 # 지난 1일 오후 전남 광주에서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열렸다. 총괄 예술감독은 ‘빈자(貧者)의 미학’이란 테마로 잘 알려진 건축가 승효상씨다. 예전에 그와 함께 몽골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물었다. ‘빈자의 미학’이 뭐냐고? 그는 다소 어눌한 말투로 짧지만 핵심만 언급했다. 진정한 건축이란 건축가의 손이 아니라 그것을 쓰고 이용하는 사용자가 일상의 쓰임에서 완성하는 것이란 취지의 얘기였다. 그러려면 건축가는 비움을 완성해야 하고 사용자는 그것을 삶에서 하나하나 가난한 마음으로 욕심내지 않고 채워 가야 하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른 지문(指紋)이 있듯이 모든 땅도 고유한 지문(地紋)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지문과 조화된 것이라야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 서래섬의 가로등 아래서 불 꺼진 세빛둥둥섬을 바라본다. 그리고 진정한 도시 디자인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시민이 함께할 수 있을 때 도시 디자인의 생명은 호흡하고 숨쉬는 법이다. 하지만 시민 없이 이권만 남을 때 그것은 표류하다 못해 강물에 처박힌다. 소박한 서래섬은 때로 물에 잠길지라도 물이 빠지면 다시 사람들의 발길 속에 채워지며 자기만의 지문(地文)을 드러내는 반면 화려한 세빛둥둥섬은 너무 채우려다 결국 이권다툼의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빈자의 미학’이 아닌 천박한 ‘부자의 미학’이 된 셈이다. 자칫 박제화되고 유물화될지 모를 오세훈표 서울 디자인의 미래가 심히 걱정된다.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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