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복지는 설득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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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스웨덴은 모두 부러워하는 복지국가다. 별 마찰 없이 그 자리에 오른 데에는 숨은 비밀이 있다. 한창 복지 수요가 폭발한 1950년대 말 이야기다. 복지예산을 대려면 판매세(우리의 소비세) 도입 말고는 길이 없었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의 61%가 반대했다. 집권 여당인 사민당의 내부 반발도 거셌다. “간접세는 평등을 추구하는 당 이념에 어긋난다.” 좌파 지식인들은 “소득에 역진적인 판매세는 말이 안 된다”고 비난했다. 이때 스웨덴 정부가 밟은 길은 설득이었다. 그것도 단계적 설득이었다.

 우선 교수와 연구원 등 관련 전문가들을 빠짐없이 불러모았다. 그들 앞에 민감한 비밀자료까지 모두 공개했다. 다른 의견을 내놓는 반대론자들을 쳐내지도 않았다. 일년 가까운 토론 끝에 “판매세를 도입하되 반드시 복지에만 지출하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복지 정책의 타깃만 잘 조준하면 오히려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정부의 설득이 먹혀든 것이다.

 그 다음에 초청한 곳이 정치권이다. 이들의 설득은 전문가들이 맡았다. 이념과 정치 논리만 고집하던 정치가들도 전문가 집단의 일치된 견해 앞에 결국 무너졌다. 여야는 당론을 바꾸고 스스로 당원들과 국민을 설득하는 데 앞장섰다. 2년이 흐른 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9%가 판매세 도입에 찬성했다. 70년 이상 집권하면서 단독 과반수를 넘긴 경우는 거의 없던 스웨덴의 사민당. 오랜 연정(聯政)에서 연마한 인내와 타협의 예술이 빛을 본 것이다. 한때 100만 명이나 미국에 이민 갈 만큼 가난했던 스웨덴의 복지 신화는 이렇게 출발했다.

 요즘 한국의 복지는 전쟁이다. 정치권이 앞장 서서 우리 사회를 편 가르고 이판사판 싸운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로 나라가 두 쪽 날 판이다. 설득과 타협은 아예 실종됐다. 정치 공방에 짓눌려 전문가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우리 정치권은 전문가를 오염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이 지긋한 사회복지 전문가들을 캠프나 위원회로 끌어들여 정치적 색채를 입혀 버렸다. 젊은 교수들은 정치권에 줄 선 선배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다문다. 광우병 파동-천안함 사태-무상복지 논란으로 이어지는 중대 국면마다 전문가들이 침묵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30~40대 소장파 복지 전문가들을 만나보면 전혀 딴판이다. 한결같이 “우리 사회의 복지논쟁은 웃긴다”는 반응이다. 복지는 정책 선택의 문제이지 정치 쟁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상급식과 반값등록금보다 노인 빈곤이 최우선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현재 국민연금의 사각지대에 놓인 빈곤노인 비율이 45%로 일본(22%)·그리스(23%)의 두 배다. 자살률은 4배나 높다. 한 소장파 교수는 “눈칫밥 먹는 어린이와 아르바이트 대학생은 안쓰럽게 여기면서, 스스로 목매는 노인을 외면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이 산업화시대의 낡은 토건예산과 농업보조금만 줄여도 노인복지를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복지는 설득이 아니라 선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승자독식의 선거판에서 “무상”과 “절반”이 난무한다. 여야 모두 철저한 표 계산에 따라 복지 카드를 선별하는 조짐도 불길하다. 30~40대 학부모들은 무상급식, 50대 표는 반값등록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장 시급한 노인 빈곤에 왜 정치권이 눈길을 안 주느냐고 소장파 교수에게 물어보니 이런 해석이 돌아왔다. “어차피 투표성향이 굳어졌다고 간주하기 때문이지요. ‘제발 노인들은 투표하지 마시라’는 이야기가 왜 나왔겠어요? 게다가 노인들은 대학생이나 젊은 부부들보다 인터넷 상의 파괴력과 결집력도 약하고….”

 앞으로 우리는 복지예산을 계속 늘려 가야 한다. 하지만 복지가 정치권의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돼선 안 된다. 휘황찬란한 정치 공약보다 소장파 전문가들에게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이들끼리는 서로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스웨덴·미국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일본형 복지”라고 속삭인다. 정치권의 볼륨은 낮추고 이들 소장파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들이대야 하지 않을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