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혈육처럼 지내며 한국문학의 산맥 형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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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호 09면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전광용(1919~88)·정한모(1923~91)와 고려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정한숙(1922~98)은 광복 직후부터 동인활동을 함께한 평생 문학 동지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정한모는 시를 썼고 출신지도 충남 부여인 데 비해 소설을 쓴 전광용(함남 북청)과 정한숙(평북 영변)은 똑같이 홀로 월남한 실향민 처지여서 평생을 혈육처럼 지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5> 실향민 작가 전광용과 정한숙

20대 중반을 넘긴 이들 세 사람과 20대 초반이었던 전영경(1926~) 등 네 사람이 ‘주막’ 동인을 결성한 것은 47년 전광용과 정한모가 서울대 국문과에, 정한숙이 고려대 국문과에, 전영경이 연세대 국문과에 재학 중일 때였다. 그 무렵 대개의 동인들이 동인지 발간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주막’ 동인은 남의 작품을 읽고 토론을 하거나, 각기 작품을 써서 돌려가며 읽은 다음 합평 형식으로 서로의 장단점을 가려내는 특이한 동인이었다. 그것이 동인 간의 우정과 유대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6·25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종전 이후 다시 뭉친 것도 그들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끈끈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때 전광용과 정한숙은 서울 휘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고 정한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쉬고 있었다. 마침 정한숙이 모교인 고려대 강사로 나가게 되어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자 전광용은 그 빈자리에 재빨리 정한모를 채워 넣었다. 그 무렵까지도 이들은 여러 간행물에 틈틈이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으나 공식적인 등단 과정은 거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춘문예를 겨냥하기로 합의했고, 55년도 신춘문예 발표에는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문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영경만이 20대였을 뿐 다른 세 사람은 30대 중반을 전후한 다소 늦은 나이였다.

특히 이때 발표된 전광용의 소설 ‘흑산도’와 정한숙의 소설 ‘전황당 인보기’는 평생 그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해 전광용은 36세, 정한숙은 33세였으나 실상 그들의 작품활동은 일찍이 20대 초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전광용은 20세 때인 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입선했고, 정한숙은 26세 때인 48년 ‘예술조선’에 소설 ‘흉가’를 발표한 것이다. 공식적인 등단 이후 소설가로서 이들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한 작품은 전광용의 ‘꺼삐딴 리’와 정한숙의 ‘고가(古家)’였다. ‘꺼삐딴 리’는 일제와 광복 이후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때그때 재빨리 변신하는 카멜레온적 인간상을 그린 작품으로 전광용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주었고, 그 후 전광용의 별명처럼 따라다녔다. ‘고가’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종가제도를 유지하려는 구세대와 여기서 벗어나려는 신세대와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등단을 전후해 각기 모교인 서울대와 고려대의 교수로 임용된 두 사람은 교수직과 작품활동을 병행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왕성한 창작욕을 과시했다. 뿐만 아니라 문학사나 소설이론 등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아 많은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문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부지런함의 결실이었다.

문학 수업 시절의 동인 명칭에 술 주(酒)자가 들어가 있던 것처럼 이들은 문단이 두루 인정하는 타고난 술꾼들이었다. 등단 이후 문인들의 술자리는 빠지는 법이 없었고, 특히 그들의 스승 격인 김동리가 주도하는 ‘주회(酒會)’에는 늘 고정 멤버였다. 두 사람의 성격, 취향, 버릇 따위는 초창기 술자리부터 쉽사리 드러났다. 우선 그들의 심한 고향 사투리였다. 그래도 정한숙은 차츰 표준화돼 가고 있었지만 전광용은 좀체 좋아지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나도 대학 시절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그의 말을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목소리 또한 우렁찬 데다 어미(語尾)가 늘 반말투여서 위압적이었다. 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석탄 백탄 타는데는/연기가 폴폴 나고요/이 내 가슴 타는데는 연기도 짐(김)도 안 나네/어랑어랑…” 민요를 부르면 좌중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지게 마련이었다.

좌중을 압도하기는 정한숙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방식은 전광용과는 차이가 있었다. 정한숙은 이름도 여성적인 데다가 깊게 파인 쌍꺼풀이며 동글동글한 얼굴 모습에 귀염성이 배어 있어서 일찍부터 여류 문인들은 그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꼽았다. 그런 외양처럼 평소의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이지만 술자리가 길어지면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곤 했다. 남이 노래를 부를 때 중도에서 가로채 자기가 부르기 일쑤였다. 누군가와 언쟁이 생길 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켜야 직성이 풀렸다. 전광용은 이런 정한숙에게 함경도 사투리인 ‘발개돌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두 사람의 그런 성격은 수많은 제자의 호오도 엇갈리게 했다. ‘작가적 기질’일 뿐이라고 감싸는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마땅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제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국문학 교수로 30년 봉직하는 동안 수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했다. 전공이 국문학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공이 국문학이 아닌데도 그들의 영향을 받고 문인이 된 제자들도 많았다. 소설가이면서도 국문학과 창작의 이론적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전광용은 ‘신소설 연구’로 사상계 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현대문학 논고’는 우리 현대문학 연구에 적잖이 기여한 역저로 평가받았다. 정한숙 역시 ‘현대 소설사’ ‘현대 한국 작가론’ ‘한국 문학의 주변’ 등의 이론서로 학계와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전광용은 정년 퇴직 후 지병인 당뇨가 악화돼 88년 6월 21일 69세의 나이로, 정한숙은 97년 9월 17일 75세의 나이로 각각 세상을 떠났다. 정한숙 역시 정년 퇴직 후 평생 취미였던 유화를 그려 문우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낙으로 삼다가 어느 날 낮잠을 즐기던 중 자는 듯 숨을 거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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