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국사업과 교육 … 단군의 땅에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33호 26면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교관들로부터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를 교재로 국사 교육을 철저히 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절망을 넘어서
⑩신흥무관학교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결정적 시기에 일본을 무력으로 구축하고 나라를 되찾는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면 먼저 독립군을 양성해야 했다. 이관직(李觀稙)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신민회 시절 이회영이 김형선·이관직·윤태훈에게, ‘멀지 않은 장래에 만주 지방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야겠으니 해산된 군인 가운데 애국자들에게 만주로 건너가도록 권해 줄 것을 미리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한 같은 책에서 “(이회영) 선생은 신흥군관학교 설립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제창한 주인공이었다. 선생의 학교 설립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초로 군사 교육의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김형선·이장녕·이관직 등 세 사람이었다”고도 회고했다.

이관직 자신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副尉)로 있다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된 인물이니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이상설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방략을 정한 이회영은 독립군을 훈련시킬 교관들로 해산 군인들을 주목했다.

1911년 음력 4월 유하현 추가가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한 망명객들은 무관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횡도촌에 망명했던 안동 유림 김대락은 망명기록인 서정록(西征錄) 1911년 5월 14일(양력 6월 10일)자에 “가서 학교를 보았는데 마침 이날 하오에 개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이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인데, 이 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元秉常)은 “1911년 봄(음력 5월께)에 이역황야의 신산한 곁방살이에서나마 구국사업으로 일면 생취(生聚: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음),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출발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신산한 곁방살이’라고 표현한 것은 현지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서 개교했기 때문이다.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興)’자를 붙여 교명을 지었지만 처음에는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라고 불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군사력의 열세였다. 나라를 되찾는데도 군사력이 가장 중요했다. 조선의 군사력은 순조 2년(1802) 1월 노론 벽파 영수인 영의정 심환지가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을 해체시키면서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그 후 조선군은 지방 민란 하나 변변히 제압하지 못하는 약졸(弱卒)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서구 열강이 밀려들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재위 33년(1896) 1월 11일 칙령 제2호로 ‘무관학교관제(武官學校官制)’를 반포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무관학교 학도 모집령에 따르면 무관학교생의 수학기간은 1년이고, 식사와 의복은 국비이며, 약간의 용돈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한 달 뒤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년 후인 고종 35년(1898) 4월 군부대신 이종건(李鍾建)이 무관학교 재건을 주청하자 칙령 11호로 ‘무관학교관제’가 다시 반포되었다. 그해 6월 200명 정원에 1700명이 지원하는 열기 속에서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때는 재학기간이 1년6개월로 늘었다. 고종은 재위 36년(1899) 6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大元帥)로서 군대를 통솔하는데, 고종 37년(1900) 1월 장연창(張然昌) 등 128명의 원수부 졸업시험 통과자는 참위로 임관되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는데 이들의 행적은 군대 해산, 망국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친일파와 항일 무장투쟁가로 극명하게 갈린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30일자에 따르면 1회 졸업생 대표였던 보병 대위 장연창이 서훈을 받는 것처럼 일부는 망국 후에도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반면 김창환, 이관직, 신팔균, 이장령, 이세영 같은 무관학교 출신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무관학교 출신들 중 일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는데, 이들의 행적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공사가 1902년 6월 20일 의정부 찬정(贊政) 겸 학부대신 민영소(閔泳韶)에게 보낸 일본 유학생 현황에 대한 조회에는 박영철(朴榮喆)·김응선(金應善)이 관비 유학생으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나오는데, 이 둘은 모두 친일에 가담한다. 반면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김경천(金擎天)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나중소(羅仲昭)는 훗날 북로군정서에서 세운 사관양성소의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독립군을 양성한다.

처음 신흥무관학교가 추가가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한 것은 중국인들이 토지·가옥 매매를 거부한 데 따른 임시방편이었다. 이회영·이상룡 등의 당초 계획은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회영과 의형제까지 맺게 된 원세개(袁世凱)의 비서 호명신(胡明新)이 이회영에게 “형이 토지를 사서 뜻하는 바를 이루어야 하겠는데, 기왕 돈 주고 토지를 살 것 같으면, 하필 추가(鄒哥)는 여러 십대를 누리고 살던 땅이라 팔기를 아까워하니, 다른 데 가서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라면서 합니하(哈泥河) 강 근처 토지를 권유했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에 따르면 신민회가 평북·평남·황해·강원·경기 등 5도에서 총 75만원의 학교 설립자금을 조달하기로 계획했지만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사건(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사실상 붕괴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학교 설립자금을 제공한 인물은 이관직이 “(이회영) 선생의 학교 설립 요청에 의해 그 설립 및 유지비를 최초로 제공한 사람은 선생의 형인 이석영이다”고 회고한 것처럼 둘째 이석영이었다. 이관직은 “그가 만일 학교 설립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우당 선생의 오랜 소원이던 군관학교도 설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재 광화(光華)라는 이름으로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동남쪽으로는 태산준령인 고뢰자(古磊子)가, 북쪽에는 청구자(靑溝子)의 심산유곡이 펼쳐져 있으며, 남서쪽에는 요가구(鬧家溝)의 장산 밀림이 둘러싸인 천혜의 요지로서 파저강(波<7026>江) 상류 합니하 강물이 반원을 그리며 압록강을 향해 흘렀다.

1912년 음력 3월부터 교사·학생들이 일심으로 신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원병상은, “삽과 괭이로 고원 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 요가구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드는 줄도 몰랐고 오히려 원기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고 회상했다.

같은 해 음력 6월 드디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되었고, 100여 명의 이주민은 낙성식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 중학과정이었고, 6개월·3개월의 속성과는 무관 양성을 위한 특별과였다. 님 웨일스(Nym Wales)의 아리랑(Song of Arirang)에는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김산(본명 장지락)의 회고가 나온다.

“합니하에 있는 대한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열여덟 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학생들이 백 명 가까이 입학하였다…학과는 새벽 네 시에 시작하며, 취침은 저녁 아홉 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게릴라 전술…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하였다-‘그날’을 위하여.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전략·전술·측도학(測圖學:지도 보는 법) 등의 이론과 보(步)·기(騎)·포(砲)·총검술·유술(柔術)·격검(擊劍) 등 전문적인 군관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철저한 국사 교육에 있었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국사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史書)였다. 무관학교 학생들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마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후렴)우리 우리 배달 나라에/우리 우리 청년들이라/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는 교가를 힘차게 부르며 결전의 날을 준비했다.

합니하 심산유곡에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깨 위에 빼앗긴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