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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패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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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중국 한(漢)나라 유방의 장군 한신(韓信)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조(趙)나라 군사를 대파했을 때다. 조나라 명장 광무군 이좌거(李左車)가 생포됐다. 한신은 그를 죽이지 않고 극진히 예우하며 연·제나라를 치기 위한 전략에 대해 가르침을 구했다. 이좌거가 거절하며 말한다. “패군의 장군은 용맹을 말할 자격이 없다(敗將 不可以言勇).” 싸움에 패한 장군은 병법을 논하지 않는다(敗將不語兵)는 것이니 실패한 자는 그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과거 패장은 용납받기 어려웠다. 장수의 의무를 저버린 책임을 물어 처벌이 뒤따랐다. 2004년작 영화 ‘알렉산더’에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이 패장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패를 용서하지 않는 상징적 의식이다. 로마제국에 맞서 싸웠던 카르타고에선 전쟁에 진 지휘관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신라 김유신 장군은 삼국 통일 후 당나라와의 싸움에서 둘째 아들 화랑 원술이 패하고 돌아오자 왕에게 직접 “왕명을 욕되게 했으니 당연히 목을 베는 게 옳다”고 아뢰었을 정도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패장의 사례도 숱하다. 유방과 패권을 다퉜던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포위돼 패하자 자결한다. 와신(臥薪)의 주인공 오나라 왕 부차도 상담(嘗膽) 끝에 쳐들어온 월나라 왕 구천에게 패하자 여생 보장에도 불구하고 자결을 선택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은 한신의 배수진을 응용해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과 일전을 치렀으나 패장이 되자 강물에 몸을 던졌다.

 패장을 처벌하지 않은 경우도 없지는 않다. 춘추시대 진(秦)나라 왕 목공은 진(晋)나라와의 ‘효산대전투’에서 대패한 후 돌아온 맹명시(孟明視)를 비롯한 장군 세 명의 죄를 묻지 않는다. 훗날 이들이 큰 공을 세워 보답했음은 물론이다. 로마제국에선 패장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전통이었다. 패전이 곧 죽음인 절박한 상황에선 과감한 작전을 짜기 어렵고,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할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패장에게 명예회복의 기회를 줬다. 바로 ‘패자 부활’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거는 배수진을 치고 ‘무상급식 주민투표 전쟁’에 나섰지만 결국 패장이 됐다. 이게 그만의 패배는 아닐 터다. 그로선 할 말이 많겠지만 패장은 말이 없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정치생명이 끝났을 수도 있고, 복지 포퓰리즘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재기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국민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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