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무산된 주민투표도 민심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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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제 실시된 서울시 주민투표가 겨우 25.7% 투표율에 그쳤다. 유효투표율(33.3%) 미달로 투표함을 열어 보지도 못했다. 오세훈 시장의 단계적 무상급식이 외면당했다. 서울시민들은 야권이 주장해온 보편적 무상급식을 새로운 정책의 방향으로 선택했다. 무상급식 논란의 결론은 분명해졌다.

 주민투표는 공직자를 뽑는 일반 선거와 다르다. 유효투표율 미달로 개표를 하지 못함에 따라 민심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낮은 투표율 자체가 정책에 대한 비토(Veto)라는 의미를 가진다. 25.7%라는 낮은 투표율은 오세훈 시장의 정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말해 준다. 이전에 있었던 다른 주민투표(주민소환 제외)가 모두 33.3%를 넘어서면서 유권자의 동의를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유권자의 뜻이 분명히 확인된 만큼 이제 오 시장은 예고했던 대로 시장직을 물러나야 한다.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져 사퇴 시기를 저울질하는 것은 맞지 않다.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인 마음 그대로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 시정(市政)의 공백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재·보궐 선거를 통해 새 시장을 선출하고, 새 시장은 시의회와 함께 전면적인 무상급식 실시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무상급식 확대에 따른 식재료의 부실화나 다른 교육 관련 예산의 삭감 등과 같은 문제가 없도록 후속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낮은 투표율은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경고라는 의미도 되새겨야 한다.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대의민주주의에 실패한 데서 비롯됐다. 한나라당인 오세훈 서울시장과 야당이 다수인 시의회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시정을 표류시킨 결과 불가피하게 택한 최후의 대안이 주민투표였다. 대의민주주의의 실패가 직접민주주의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사실상 직접민주주의마저 외면한 꼴이 됐다. 야당이 투표 불참운동을 벌인 탓도 있겠지만, 이전 주민투표와 비교해 볼 때 전체 유권자들의 외면과 무관심은 확실하게 드러났다.

 특히 투표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주민투표의 민심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투표함을 열지 못한 것을 두고 “사실상 오세훈 시장의 승리”라고 주장하는 홍준표 대표의 태도는 민심의 무서움을 모르는 아전인수(我田引水)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주장이 분명히 거부당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투표에 드러난 민심을 읽고 새로운 정책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6·27 지방선거와 올해 4·27 재·보선에 이어 세 번째 투표 패배를 기록하게 됐다. 어떤 변명으로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심을 묻는 투표 앞에서 한나라당은 내분에 빠졌다. 최고위원 선거에서 남경필 후보는 아예 주민투표를 반대했다. 친박계 유승민 최고위원은 이번 투표에서 중앙당이 서울시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며 ‘방관론’을 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서울시민이 판단할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사실상 당과 오 시장의 도움 요청을 외면했다. 중앙당은 총력지원을 선언했지만 실제로 지역에서 헌신적인 지원운동은 별로 없었다. 한나라당은 내분과 무기력으로 보수적 가치를 지키지 못했다. 보수의 실패란 비판을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번 투표 무산에 따라 한국 사회의 복지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보편적 복지를 주장해온 야당과 시민단체는 무상보육과 무상의료 그리고 반값 등록금의 영역으로까지 무상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이번 투표를 두고 “복지사회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이라며 무상복지의 확대를 예고했다. 곽노현 교육감은 “서울시민이 보편적 복지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무상급식과 관련해선 보편적 복지가 유권자의 뜻임이 확인됐다. 하지만 이번 투표가 의료나 보육까지 전면 무상으로 실시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확대해석돼선 안 된다. 복지확대라는 민심은 분명하지만, 의료나 보육은 급식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어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일본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재정적자 때문이다. 우리 정부의 재정적자도 급속히 불어나고 있다. 복지는 재정의 균형이란 구조 속에서 합리적으로 선택돼야 한다. 이번 주민투표에 담긴 유권자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국가발전전략이란 큰 틀을 고려하는 현명한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