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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민 혁명 7개월 … 아랍 최장기 독재 결국 무너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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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1일(현지시간)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 모인 수 만 명의 시민이 카다피의 차남이자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던 사이프 알이슬람이 시민군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환호하고 있다. [벵가지 AFP=연합뉴스]


42년 동안 리비아를 철권 통치한 아랍 최장기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69)의 시대가 최후의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다. 올 1월 ‘아랍의 봄’을 이끌었던 튀니지 ‘재스민 혁명’ 영향으로 2월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와 시민군의 공세가 시작됐지만 카다피가 6개월 만에 이처럼 초라하게 몰락하리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드물다. 그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온 카다피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1942년 지중해 연안 도시 시르테 인근 베두인 텐트에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비아가 이탈리아의 40년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 왕국으로 독립(1951년)하기 9년 전이었다.

 10대 때 카다피는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을 동경했다. 아랍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세워 젊은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을 몰아낸 나세르를 ‘영웅’으로 여겼던 것이다.

 69년 육군 대위 카다피는 나세르를 모방해 젊은 장교를 모아 ‘자유장교단’을 구성했다. 그해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신병 치료를 위해 터키에 건너간 사이 카다피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왕정을 폐지하고 혁명평의회가 지배하는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세웠고, 혁명평의회 의장·국가원수·군 사령관 자리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카다피는 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독특한 형태의 ‘인민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의회 제도와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평생을 반(反)서구주의와 이슬람 민족주의를 부르짖던 카다피는 서방 세계의 ‘공공의 적’이었다. 각종 테러에 개입하고 반미(反美) 무장단체를 지원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88년 270명을 숨지게 한 팬암 항공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을 잇따라 일으켰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86년에는 미군의 트리폴리 폭격과 경제 제재 등 서구의 압박에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92년 유엔이 제재에 동참하면서 원유 수출이 봉쇄당하자 리비아 경제가 급속히 피폐해졌고 카다피도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99년 4월 로커비 사건 피의자인 리비아인 2명을 영국에 인도했고 유엔은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풀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서방 세계에 본격적으로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2003년 12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했고, 이듬해엔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이런 가운데도 리비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카다피는 해외 순방 중에는 여성 경호원들이 지키는 베두인식 텐트에 머무는 등 기행을 일삼아왔다.

  이에스더 기자

◆가말 압델 나세르(1918~70)=이집트의 2대 대통령. 육군 소위 시절 젊은 장교들과 자유장교단을 결성, 52년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을 추방하고 혁명위원회 지도자가 됐다. 56년 6월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반외세·범아랍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 같은 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해 아랍권의 지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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