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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남조선영도소조’ 정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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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외교가 기록과 선례의 무게를 지고 사는 생물임을 감안할 때, 암호명 ‘동해사업’으로 불린 한·중 국교 정상화 교섭은 성과와 함께 아쉬움도 컸다.” 한·중 수교 19주년을 맞는 24일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를 펴낸 정재호(51·사진)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평가다. 교섭 과정을 면밀히 분석한 정 교수는 “한·중 수교 교섭은 각론에 있어 조급하고 준비가 부족했던 면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진핑(習近平·습근평·58) 중국 국가부주석이 6·25전쟁을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부른 것도 “한국이 중국과 수교 협상을 하면서 양국 관계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한 결과가 역사의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것”이라고 정 교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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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또한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한국이 요청하고 중국이 받아들여 이뤄진 게 아니라 중국의 필요와 전략에 따라 한국이 상당 부분 끌려갔던 것이라고 정 교수는 평가한다. 우선 중국의 준비가 한국보다 앞섰으며 또 치밀했다. 북방정책을 내세운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기 이전인 1983년부터 중국은 이미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고려해 한국어 요원들을 대폭 확충하기 시작했다. 89년 5월엔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지시로 한국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남조선영도소조(南朝鮮領導小組)’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이 소조의 구성원 면모가 화려해 주목을 끈다. 조장은 톈지윈(田紀雲·전기운) 부총리 겸 정치국원이 맡았다. 또 군부 실력자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의 아들인 웨펑(岳楓·악풍, 본명은 葉選寧), 리셴녠(李先念·이선념) 전 국가주석의 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유아주) 등 현역 군인이 소조에 포함됐다. 태자당(太子黨, 고위 관료의 자제) 출신의 현역 군인들이 소조에 들어간 건 철저한 보안 유지와 함께 북한이 중국 군부 내 친북 세력을 이용해 한·중 수교 방해 공작을 펼치더라도 이를 완충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중국 지도부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매우 치밀하게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를 열망하면서도 때가 오기까지 속내를 감추고 기다리는 전략을 펼쳤다. 88년 한·중 수교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해 여러 차례 러브콜을 보냈지만 중국은 응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특사를 자임하는 많은 인물이 경제 지원 보따리를 들고 쇄도하자 중국의 원로 보이보(薄一波·박일파)는 90년 방중한 김종인 경제수석에게 “당신네 하는 걸 보니 천둥소리는 요란한데 정작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多雷無雨)”며 비꼬기도 했다. 중국이 실제 행동에 나선 건 91년 말 남북한의 유엔 가입이 이뤄진 뒤다. 분단국끼리의 수교로 대만 문제 처리에 있어 예외가 생길 것을 우려했던 중국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와 남북관계가 더 이상 연계되기 어렵게 된 후에야 수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1992년 9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왼쪽)이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은 실제 교섭에도 능란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중국 편’이라는 입장에서 느긋하게 협상에 임했다. 중국의 협상 대표 장루이제(張瑞杰·장서걸) 본부대사는 협상 타결에 최소한 반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한국은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만료를 몇 달 앞둔 시점에 북방외교라는 용의 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심정으로 수교를 서둘렀다”는 권병현 협상대표의 회고처럼 조급함을 드러냈다. 장루이제 대사가 “첫 회담이 끝난 뒤 훨씬 빨리 수교가 가능하리라 예상했다”고 말한 것처럼, 노태우 대통령 임기 내 수교와 국빈 방문 성사에 급급했던 한국은 교섭 전반에 있어 중국의 페이스에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협상 과정에서 한국은 실속을 챙기기 어려웠다. 92년 6월 2~3일 베이징에서 열린 2차 예비회담에서 한국 대표단은 ▶북한 편향적 정책의 조정 ▶공격용 무기의 북한 공급 중단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명시적 지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해명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에 대한 설명 등을 요구했다. 반면에 중국은 줄곧 한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일 것과 함께 대만과의 모든 공식 관계 단절, 대만 재산의 일괄 반환 등을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측 요구사항은 중국 측과 비교해 추상적이거나 덜 구체적이었기에 중국은 필요할 때마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며 아쉬워한다. 한국전쟁 참전 문제와 관련해서도 중국은 과거의 ‘유감’스러웠던 일이라고 구두로 밝히면서, 공식 기록에는 남기지 않되 언론 보도는 괜찮다는 선에서 타협했다. 하지만 수교 당일 우젠민(吳建民·오건민) 중국외교부 대변인은 6·25전쟁에 대한 사과가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실무근’이라고 답했다. 결국 기록이 없는 합의를 한 것이었다.

 수교 과정의 아쉬움은 최근 중국의 ‘부상’과 맞물리면서 한국에 심각한 전략적 딜레마로 다가온다. 한·미 포괄적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전략적 대안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신간 『중국의 부상과 한반도의 미래』에서 한국이 선택 가능한 10가지 시나리오(표 참조·일부)를 제시한다. 이 중 그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수렴되는 범위 안에서 상황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 우리의 입장을 공개적이면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현안별 지지’나 뛰어난 외교력에 기반을 둔 ‘위험분산전략(hedging, 양다리 걸치기)’이 우리의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주도의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 계획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류샤오보(劉曉波·유효파)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엔 한국 대사가 참석하도록 하는 식을 의미한다. 이는 대만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분쟁 발발 시 ‘연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노력의 일부분이다.

 정 교수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무모한 낙관론보다는 신중론에 기반해 “명석한 이해와 준비에 바탕을 두되 민활한 대처능력을 갖춘 명민외교(明敏外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2, 제3의 서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유상철 기자·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동해사업=1992년 4월부터 8월 24일의 공식 수교까지 비밀리에 진행된 한·중 국교정상화 교섭을 일컫는 작전명. 본격적인 수교 교섭은 첸치천(錢其琛·전기침) 중국 외교부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중국은 수교 협상과 관련해 ‘비밀’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한국은 맹방이었던 대만의 방해 공작을 막기 위해 중국과 가까운 바다인 황해가 아닌 ‘동해’라는 이름을 사용해 계획을 위장했다. 동해사업을 총괄한 건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이상옥 외무장관, 김홍배 안기부 제2차장으로 이뤄진 ‘3자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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