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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일본, 황국신민 DNA를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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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교과서 왜곡, 독도 문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본의 고질적인 3대 풍토병이다. 교과서와 독도 문제는 또 발병한 상태다. 그나마 야스쿠니가 조용한 덕에 최악으로 도지진 않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8월 15일에도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를 하지 않았다. 대신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전몰자 묘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 가해 책임에 대해 언급했다. 민주당 정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를 두고 우익은 국가의식 결여라고 맹비난한다. 우익이 말하는 국가의식은 황국신민(皇國臣民) 의식이다.

 야스쿠니가 어떤 곳인가. 군국주의 일본에 전쟁의 에너지를 불어넣던 국가기관이었다. ‘천황=국가=신’이라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초국가주의 신앙의 성전이다. ‘천황을 위해 전사(戰死)하는 건 영예’라는 의식을 심어준 곳이다. 그에 따라 수많은 황국소년들이 기꺼이 목숨을 버렸다. 야스쿠니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거나 유족의 슬픔을 달래는 추도시설이 아니다. 황국신민이라면 무릇 이렇게 죽어야 한다며 전사를 모범으로 치켜세우는 국가적 현창(顯彰)시설이다. 이곳을 참배하는 것과 조상의 묘에서 제사 지내는 건 본질적으로 다르다.

 야스쿠니의 전시관 유슈칸(遊就館)을 가 보라.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며 군기를 고취하는 전시물로 가득하다. 세계 최강이었던 제로센 전투기, 필사필살(必死必殺)의 구국병기라던 인간어뢰 가이텐(回天), 제국해군의 자랑이던 전함 야마토(大和)의 모형…. 구내식당의 인기메뉴도 그냥 카레가 아니라 제국해군의 조리법으로 만든 ‘해군 카레’다. 온통 군국주의의 회고다.

 우리는 흔히 A급 전범의 합사(合祀)를 비판하는데, 이는 본질이 아니다. A급 전범을 야스쿠니에서 빼내면 아무 문제 없나. 결코 그렇지 않다. 야스쿠니는 그와 상관없이 황국사상의 상징이자 침략전쟁의 도구였다. 이곳을 참배하는 국가 지도자가 어떻게 평화를 논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일본 우익은 해마다 야스쿠니를 부각시키려 애쓴다. 지금의 평화는 전몰자들의 희생 덕분이다, 그들에게 감사하는 건 국민의 의무다 하면서 말이다. 이게 일본인들에겐 제법 먹혀 든다. 하지만 결정적인 게 빠졌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나 하는 부분이다. 그들이 일으킨 전쟁은 구국전쟁으로 미화된다. 그들은 침략전쟁을 반성하지 않는다. 대신 왜 패전했는지 곱씹는다.

 또 그들은 국민의 고통 속에 교묘히 섞여 들어가 스스로 전쟁의 피해자라고 의식화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전후세대는 침략에 대한 면죄부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본인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우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적잖다. 밖에서 보면 온통 우경화로 쏠리는 듯하지만, 현대 일본은 나름대로 원심력이 작동하는 사회다. 다양하고 다원화된 사회이기도 하다. 일본은 어떻다 하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같은 국민이지만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잔인한 일본인만큼 잔인한 인간은 없고, 친절한 일본인만큼 친절한 사람도 없다. 얍삽한 일본인보다 더 얍삽한 인간은 없고, 정중한 일본인보다 더 정중한 사람 또한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단일체를 상정해 상대하면 안 된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이도 있지만, 한류에 푹 빠진 사람은 더 많다. 야스쿠니로 향하는 이가 있는 반면, 쇼핑백을 잔뜩 들고 명동 거리를 누비는 사람도 있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일본·일본인 전체가 아니다. 우익이 집요하게 퍼뜨리려는 황국신민의 DNA다. 이게 잠잠하면 양국관계가 원만하지만, 튀어나오면 경색된다. 지금이 후자(後者)에 해당한다. 요즘 일본에선 대지진과 불황을 국난으로 규정하고 민족단결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게 황국신민 DNA를 자극할까 걱정스럽다. 양식 있는 일본인이라면, 다원화된 시민사회라면 그 DNA의 발현을 억눌러야 한다.

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