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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달려왔다, 이젠 나를 위해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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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피터 체루이요트 키루이(左), 케네니사 베켈레(右)

케냐의 1만m 대표 피터 체루이요트 키루이(23)는 남을 위해 달리는 선수였다. 유명 마라톤 대회에서 일류 선수들의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페이스 메이커’로 달렸다. 그러나 대구에서 키루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달릴 것이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키루이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뛰는 첫 세계대회다. 키루이는 대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키루이는 지난달 17일 케냐육상선수권 1만m에서 27분32초10으로 우승했다. 중장거리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케냐에서 키루이의 우승은 대회 최대 이변이었다. 지난해 아프리카선수권 1만m와 세계하프마라톤선수권을 제패한 윌슨 키프롭, 2007 오사카 세계선수권 1만m 동메달리스트 마틴 마타티는 각각 2위(27분32초90)와 3위(27분38초60)로 밀렸다. 지난 4월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제프리 무타이는 27분38초90으로 4위에 그쳐 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키루이는 “올해 세운 목표를 이루었다. 믿을 수 없다”며 감격했다. 올해 경찰청에 입단한 그는 소속 부대 훈련캠프에서 달리고 또 달리며 대표팀 선발전에 대비해 왔다.

 지난해까지 키루이는 ‘그림자 선수’였다. 2010년 4월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패트릭 마카우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했다. 마카우는 2시간4분48초로 우승했다. 지난해 11월 시카고 마라톤에서는 새미 완지루의 페이스메이커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완지루는 이 대회에서도 1위(2시간6분24초)를 차지했다. 우승 제조기 페이스메이커였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가 대구 대회를 목표로 칼을 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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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일 마라톤 대회에서는 주최 측이 기록 향상을 위해 페이스 메이커를 ‘고용(雇用)’한다. 이들은 선두그룹의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도록 초반부터 스피드를 낸다. 통상 선두그룹의 질주에 탄력이 붙는 20~30㎞ 사이에서 임무를 마친다. 수준급 페이스 메이커의 경우 초청비 1만~2만 달러(약 1100만~2200만원)를 받는다. 적잖은 돈이지만 대회의 들러리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때문에 이들의 꿈은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달고 경주에 나서는 것이다.

 세계적인 선수들은 대표팀이나 개인 차원에서 페이스 메이커를 운영한다.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겠다는 키루이의 꿈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와 케네니사 베켈레는 장거리의 전설에서 전설로 이어진 계보다. 베켈레는 게브르셀라시에의 훈련파트너와 페이스 메이커 생활을 했지만 결국 고용자를 넘어서는 훌륭한 선수가 됐다.

 게브르셀라시에는 1만m에서 올림픽 2연속 우승(1996·2000년), 세계선수권 4연속 우승(1993~99년)을 달성한 90년대 최강이었다. 2000년대 들어 마라톤으로 전향한 게브르셀라시에는 2006년부터 베를린 마라톤에서 4연속 우승했다. 특히 2008년 대회에서 세운 2시간3분59초는 지금까지 세계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난공불락의 전설을 무너뜨린 주인공이 베켈레다. 베켈레는 2004 아테네 올림픽 1만m에서 우승하며 함께 뛰었던 게브르셀라시에의 올림픽 3연속 우승을 저지했다. 베켈레 역시 올림픽 2연속 우승(2004·2008년)과 세계선수권 4연속 우승(2003~2009년)을 달성해 대구 대회에서 게브르셀라시에의 기록을 넘어서려 한다. 키루이는 대구에서 베켈레를 만난다. 베켈레는 지난해 1월 부상을 당한 뒤 한 번도 공식 대회에 나서지 않았다. 햇병아리 키루이의 각오는 당차다. 그는 “대구에서 나의 메달 획득을 막을 대상은 나쁜 날씨와 부상뿐”이라고 자신했다. 에티오피아는 케냐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하다. 키루이는 “에티오피아의 경기운영 패턴을 공부했다. 경험 많은 대표팀 선배들과 함께 작전을 잘 짜겠다”고 강조했다. 대구에서 입상을 노리는 키루이는 내년 로테르담 마라톤에도 자신의 이름을 달고 출전할 계획이다.

  장치혁 기자

◆페이스 메이커=주로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후보 선수들의 기록 향상을 위해 앞서 달리는 선수. 선두그룹 앞에서 경기 초반부터 스피드를 낸다. 통상 20~30㎞ 사이에서 임무를 끝낸다. 올림픽·세계선수권 등 종합대회에는 페이스 메이커가 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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