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물가·금리 빨간불 …‘트릴레마’에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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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쇼크에 한국 경제가 ‘트릴레마’(trilemma·삼각 딜레마)에 빠졌다. 환율-물가-금리의 세 가지 변수가 서로 얽혀 한쪽을 풀려면 다른 한쪽이 꼬여버리는 딜레마다. 토끼 세 마리가 각 방향으로 뛰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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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치솟는데, 오름세를 유지하던 원화가치는 약세로 방향을 틀었다. 그나마 수입물가를 낮춰주던 든든한 지원군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당초 기준금리를 인상하려던 움직임도 동결 쪽으로 선회했다.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아야 하지만 이젠 경기 위축을 먼저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로 옮겨 붙을 조짐도 보인다. 한국 경제에도 나쁜 신호다. 수출이 줄고 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 벌써 몇몇 전문가들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4% 달성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를 해결할 ‘카드’가 없다는 게 또 다른 딜레마다.

 그간 환율정책에 대해선 정부 내에서 온도차가 있었다. 수출을 주관하는 지식경제부 최중경 장관은 “환율로 물가를 잡겠다는 것은 순진무구한 발상”이라며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문했다. 하지만 외환정책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는 원화 강세를 사실상 용인하고 있었다. 물가 때문이다. 재정부 박재완 장관은 올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물가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원화가치가 1주일 새 40원 가까이 하락하면서 박 장관의 고민이 시작됐다. 심리적 저항선인 1100원 선을 넘어설 경우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이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화가치 하락세가 이어지면 수입물가가 계속 오르면서 국내 물가상승을 더 부추길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 개입이 쉽지 않다는 게 박 장관의 ‘딜레마’다. 원화가치 하락을 인위적으로 막다 보면 우리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수출이 꺾일 수 있다. 고려대 경제학과 오정근 교수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수출이 감소하면 실업률 증가 등 큰 부작용이 나타난다”며 “각국이 자국 통화 가치를 내리려는 ‘환율전쟁’이 벌어질 마당에 원화가치 상승을 묵과하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박 장관은 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현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앞으로 동향을 봐가며 전망치와 정책대응 수정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어중간한 답변을 내놓았다.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도 진퇴양난이다. 지난달만 해도 가파른 물가상승세 때문에 기준금리 인상은 기정사실 분위기였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까지 나서 “현재 3.25%인 정책금리가 최소 4%는 돼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달 1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김 총재는 “9월 이후 기저효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낮아지겠지만 물가상승 압력이 낮아지는 건 아니다”라며 금리 인상을 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9일 국회에 출석해서는 “최근 급변하는 금융시장 상황을 고려해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판단할 것”이라며 입장을 선회했다.

 대신증권 김의찬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의 상단인 4%에 도달해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게 정상”이라며 “그러나 실물경제의 급격한 침체 우려 때문에 이번 달에는 기준금리가 동결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직접적인 재정정책을 펼치기도 난감하다. 경기 침체 때는 정부 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오르는 물가가 발목을 잡고 있다.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고물가-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이 울린다.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금리인상 압력이 커지는 식으로 각 경제변수 간 상쇄효과가 발생한다”며 “각 변수가 제각각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 정부의 트릴레마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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