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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말 한·일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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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

일전에 서울에 온 일본인 A씨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역대 정권의 대일 정책에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임기 초반에는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고 우호 정책을 펴지만, 임기 말이 되면 과거사를 강조하고 강경 정책으로 선회한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도 그런 패턴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견도 그는 덧붙였다. A씨는 한국 사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 수립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현상만을 놓고 보자면 A씨의 분석은 그럴 듯해 보인다. 임기 중 다시는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외교 전쟁’까지 선포했고 그의 재임 당시 양국 관계는 파국에 가까웠다. 전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DJ는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빗장을 풀고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 서명했지만 임기 후반 야스쿠니 참배와 역사교과서 파문이 터지자 일본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했던 YS 역시 처음부터 대결정책을 펴지는 않았다.

 A씨는 이런 현상을 한국의 국내 정치나 선거 전략의 탓으로 돌리는 듯했다. 하향곡선을 긋는 지지율을 끌어올려 레임덕을 돌파하고 다음 대선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카드로 대일 강경책만 한 게 없다는 해석이 그의 말에 숨어 있었다. 인화력 센 반일 감정을 자극한 뒤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인이 선봉에 서는 모습을 보이면 표를 모으는 득책이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일본은 가만있는데 한국의 정권이 정치적 이해관계만을 따져 한·일 관계를 우호와 긴장의 롤러코스트에 태우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반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역대 정권마다 대일 정책의 기조 변화가 있었다면, 그건 아무런 이유 없이 나온 게 아니라 그때마다 일본이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란 요지였다.

 A씨와 헤어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도 파문이 터졌다. 처음엔 그 누구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을 우리 스스로 키우는 과정을 지켜보자니 자꾸만 A씨의 말이 떠올랐다. 자민당 의원들의 발이 공항 입국장에서 묶일 것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권 실세가, 독도까지 달려가 ‘1일 경비 체험’을 한 것이 표를 의식한 인기영합형 퍼포먼스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독도 문제는 곧 제2 라운드로 돌입할 태세다. 국회의원들이 독도에 가서 회의를 여는 순간 일본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강도를 한 단계 더 높인 대책을 내놓을 것이다. 여기에다 때마침 불거진 동해 표기 문제, 8·15를 앞둔 시기적 민감성까지 얽혀 들면 국내 여론은 비등점을 향해 치닫게 된다. 정부는 초강경 대응 이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고 남은 건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런 악순환의 굴레를 끊기 위한 진지한 고민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다간 언젠가 A씨가 쓸지도 모를 논문에 사례를 하나 더 보태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국 역대 정권의 임기 말 현상과 한·일 관계의 상관관계’란 제목의 논문에 말이다.

예영준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