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흙더미에 묻힌 건국 대통령 유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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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울 종로구 이화장(梨花莊)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유물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다. 이 집은 원래 조선 중기 고위관리가 살았던 곳이다. 1945년 8월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3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여기서 이승만이 조각(組閣)을 발표했다. 이런 역사적 가치로 건물은 사적(史蹟) 497호로 지정됐다. 역사적인 전시품 450여 점, 이승만 동상 그리고 유족이 사는 생활관 등이 있다.

 지난 27일 집중호우 때 전시관 뒤편에 있는 높이 4~5m 화단이 무너졌다. 토사가 덮쳐 건물 외벽이 상당 부분 파손되고 전시품 150여 점이 흙더미에 묻혔다. 대통령 부부가 남긴 식탁·주방기구·책장·낚싯대 등이 부서졌다.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은 화단 붕괴를 우려해 1년 전부터 종로구청에 예방조치를 건의했으나 구청은 공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화장은 대한민국 건국의 숨결이 깃든 역사적인 건물이다. 건국 운동가 이승만은 이곳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좌파의 바람을 뚫고 민주주의·자본주의·개방주의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이승만은 재임 말기 독재와 부정부패로 4·19 의거를 맞았다. 그 때문에 그의 많은 공적은 역사의 뒤편에 숨어야 했다. 하지만 이화장만큼은 그런 역사의 그늘과 관계없는 건국의 산실이다. 유품은 초대 대통령 부부의 청렴했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음지 역사의 유적도 보존해야 하거늘 이런 유서 깊고 자랑스러운 장소를 후손들은 진흙더미에 내어주고 말았다. 역사를 지킬 줄 모르는 부끄러운 국민이다.

 찬반논란에 휘말렸던 박정희 기념관은 올가을에 준공된다. 김영삼·김대중 기념관은 이미 있고 김영삼 기념관은 하나 더 건립될 예정이다. 한국 사회는 건국 대통령의 기념시설을 더 이상 역사의 길거리와 진흙더미에 방치해선 안 된다. 반듯한 기념관을 짓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처럼 지지자들이 일정 기금을 모으면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면 된다. 흙더미는 이화장뿐 아니라 국민의 가슴으로도 쳐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