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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이탈리아 명품 남성복 비결, CEO 3명에게 들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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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벨베스트(Belvest)’ ‘인코텍스(Incotex)’ ‘이사이아(Isaia)’. 국내 소비자들에겐 생소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정평 있는 이탈리아 남성 의류 명품 브랜드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버그도르프 굿맨, 일본 도쿄의 이세탄 같은 고급 백화점에 입점해 있다. 오는 9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이 6층 전체를 털어 확대 개장하는 남성명품관에도 들어온다. 신세계는 명품관 개장을 앞두고 이들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했다. 정장 윗도리 주머니 모양을 약간 바꿔 달라, 양복 뒤트임이 하나인데 둘로 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한국 소비자의 체형과 기호에 맞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을 고쳐 달라고 요청한 것. 이런 요구를 하면서도 같은 디자인에 같은 치수의 옷은 두 벌씩만 사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들 명품 업체는 두말 없이 받아들였다. 어떻게든 한국시장을 새로 뚫어 보려는 안간힘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명품이라면 디자인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소비자 한 명 한 명의 요구에 맞는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현지의 이들 회사를 찾아가 제품 생산과 디자인에 담긴 철학을 들어봤다.

밀라노·파도바(이탈리아)=권혁주 기자

니콜레토 ‘벨베스트’ 대표

“마에스트로들이 경쟁력 원천 … 이직할 생각 안 들 만큼 대접”


지난 14일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시 인근의 남성 정장 업체 ‘벨베스트’ 공장. 나디아 알레그로라는 중년의 여성 근로자가 옷감 위에 연방 하얀 분필로 선을 그어 댔다. 그가 맡은 일은 무늬 있는 겉감을 재단하는 것. 이 일만 벌써 30년째다. 그는 “5년은 배워야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옷감 자르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성 정장 윗도리는 앞·뒤·소매·주머니·옷깃을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는 것. 처음 원단을 자를 때 잘못하면 나중에 이어 붙인 부분에서 무늬가 어긋나 버린다. 이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재단하는 법을 익히는 데 적어도 5년은 걸린다는 게 알레그로의 설명이다.

 30년이 됐다지만 그의 경력은 벨베스트에서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안감 재단사는 36년째였다. 벨베스트의 마리아 니콜레토(사진) 대표는 “한 분야에서 묵묵히 정진한 마에스트로(Maestro·거장)들이야말로 벨베스트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이들에게 일을 배우며 미래의 마에스트로로 성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마에스트로급 근로자에 대한 대우는 영업 비밀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42년간 원단 구매를 맡아온 루게로 베니에로는 “다른 데 갈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접해 준다”고 자신이 받는 처우를 에둘러 표현했다.

 옷은 수작업으로 만든다. 그래서 디자인을 이리 저리 고쳐 달라는 신세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했다. 심지어 양복 단추 구멍 언저리가 쉽게 해지지 말라고 시침질을 하는 것까지 한땀 한땀 손 바느질로 한다. 이 일을 하는 단추 구멍 담당자도 40년 경력자다. 벨베스트의 마케팅 담당 안드레아스 카우어스는 “수작업 200단계를 거쳐야 정장 한 벌이 탄생한다”고 소개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이 이 회사에서 개인 정장을 맞추기도 한다. 고(故)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인 개인 맞춤 고객이었다. 니콜레토 대표는 “개인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지금도 상당수 왕족·정치가·예술가·스타들이 옷을 맞춘다”고 전했다.

그리아리오토 ‘인코텍스’ 사장

실용주의 옷 만드는 실용주의 CEO

직접 의자 옮겨다 앉은 뒤 인터뷰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던 취재진 앞에 사장이 나타났다. 앉을 의자가 없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방 한쪽에 있던 의자를 직접 옮겨 와 앉았다. 직원들은 사장이 그러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난 15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패션업체 슬로웨어 전시장(쇼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회사의 마리오 그리아리오토(사진) 사장은 “우리는 제품을 철저한 실용주의 정신으로 만든다”며 “그래서 일상적인 행동도 실용주의에 맞춰서 한다”고 말했다. 사장이 직접 할 수 있는데도 잡일을 직원에게 시키는 것은 실용주의적 태도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슬로웨어가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만드는 제품 자체가 그런 부류여서다. 이 회사는 남성 캐주얼이 전문이다. 캐주얼이면서도 명품 대접을 받는다. 대표 브랜드인 ‘인코텍스’ 면바지는 일본 도쿄 이세탄 백화점에서 한 벌에 3만 엔(약 40만원) 안팎에 팔린다.

 회사 이름 ‘슬로웨어(Slowear)’는 ‘느리다(slow)’와 ‘입다(wear)’의 합성어. 패스트푸드와 반대되는 ‘슬로푸드’란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천천히 손으로 만든다는 뜻도 담겼고, 보기 좋고 입기 편하다는 의미도 있다. 웨어(wear)를 ‘닳다’로 해석하면 ‘잘 닳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역시 실용주의적 생각이 담긴 이름인 것이다.

 그리아리오토 사장은 “실용주의 근간에 혁신을 입힌 것이 슬로웨어 제품”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혁신이란 끝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 이를 위해 디자이너들은 모두 20~30대 젊은이들로 채웠다. 젊은이들이 혁신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다는 까닭이었다. 주고객층이 30대여서 고객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디자이너가 필요하다는 판단도 곁들여졌다.

 그리아리오토 사장은 “모두들 중국 시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이랬다. “우리는 ‘삐까번쩍(flash)’하게 차려입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가 아니다.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갖춘 계층이 우리 고객이다. 그런데 아직 중국 소비자들은 ‘삐까번쩍’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시장은 우리가 들어갈 곳이 아니라고 본다.”

마누치 ‘이사이아’ 사장

“고객이 옷 입고 거울 앞에 선 순간 누구와도 다르다는 ‘개성’ 느껴야”


그야말로 새파랬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이사이아 전시장에 있는 남성 정장 윗도리 몇몇이 그랬다. 어떤 저고리는 체크 무늬가 선명했다. 양복 상의라기보다 선물 포장지 같은 느낌을 주는 무늬였다. 한국에서 과연 누가 이런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자는 이런 인상을 받았노라고 노골적으로 이사이아의 사장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지오바니 마누치(사진) 사장은 “이사이아의 스타일이 한국 소비자들에게 파고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하지만 한국 소비자들이 개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머지않아 이사이아가 선호 브랜드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답했다. 그는 “이는 한국에 진출하기 위해 2006년부터 5년간 한국 문화와 소비 성향 등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내린 결론”이라고 덧붙였다.

 마누치 사장은 이사이아 제품 디자인의 핵심을 ‘개성’이라고 했다. 이는 본사가 있는 나폴리의 전통에서 비롯됐다. 나폴리는 중세부터 축제가 이어져 온 도시. 축제 때 정장을 차려입으면서도 눈길을 끌려다 보니 개성 강한 디자인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누치 사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것 역시 이사이아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예를 들어 이사이아는 정장 안감에서도 개성이 묻어나도록 디자인한다는 것이다. 윗옷을 벗을 때 다른 사람이 안감을 볼 수 있다는 이유다. 이에 더해 무엇보다 고객이 안감에 대해서까지 만족할 수 있도록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론도 담겨 있다. 단추나 지퍼까지 모두 이탈리아제 중에서 고르고 고른다는 게 마누치 사장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옷 만드는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우리는 인더스트리(industry)가 아니다”는 표현을 썼다. 대량으로 같은 옷을 찍어 내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래선 이사이아가 내세우는 ‘개성’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마누치 사장은 “고객이 이사이아 제품을 입고 거울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자는 게 이사이아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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