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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장관 박재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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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경제부문 차장

2000년쯤이었다. 당시 재정경제부를 출입하던 기자는 거시경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늘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전문가 그룹에서 벗어나 이왕이면 새 인물을 찾고 싶었다. 이리저리 추천을 받은 끝에 ‘경제학을 잘 이해하는 행정학자’로 통했던 성균관대 박재완 교수와 통화를 했다. 뜻밖이었다. 박 교수는 “내 전공분야(재정학)와 달라서 정확하게 코멘트하기 힘들다”며 손사래를 쳤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자기 전공분야도 아닌데 오지랖 넓게 나서는 전문가가 우리 사회에 어디 한둘인가. 그와의 짧은 통화는 그런 점에서 신선했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오늘로 취임 51일째인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러모로 예전 장관들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우선 권위적이지 않다. 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인원을 최소화했다. 장관 따라 국회에 나오는 공무원도 확 줄었다. 과장급은 웬만하면 나오지 않게 하고 꼭 필요한 국장만 부른다. 처음엔 “정말 안 가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던 국·과장도 이젠 그러려니 한다. 23일 제주도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강연에는 수행비서도 없이 혼자 간다. 가족과 함께하는 짧은 여름휴가 중간의 강연임을 감안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보좌관에게까지 같은 각도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장면이 여의도에서 종종 목격된다. 장관실 열쇠는 본인이 직접 갖고 다닌다. 주말에 필요해 사무실에 나오더라도 비서실 직원의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다.

 권위가 빠진 빈자리엔 실용이 들어앉았다. 요즘같이 더울 때는 드레스코드에 구애받지 않고 양복 안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고 장관회의에 나간다. 과천을 비우고 광화문·여의도에 나가 있는 장관을 찾아가 보고하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웬만한 보고는 문자메시지나 e-메일로 처리한다. 대면(對面)보고는 줄고 서면보고가 많아졌다. 그렇다고 직원들의 긴장감이 떨어진 건 아니다. 보고서를 보고 의문이 나면 실무자인 과장들에게 직접 전화를 건다. 장관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 턱이 없는 어느 과장은 모르는 번호가 떠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가 “박재완입니다. 전화 부탁합니다”라는 친절한(?) 문자메시지를 받고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한 고위 관료는 “장관이 숫자감각이 뛰어난 데다 워낙 빨리 읽고 빠르게 피드백을 해주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탈권위·실용을 내세우는 박 장관을 재정부의 한 국장은 ‘신세대 장관’으로 평했다. 신세대 박 장관은 이명박 정부 창업공신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무게가 실렸던 강만수 전 장관이나 정권 지분은 없었어도 카리스마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장관직을 수행했던 윤증현 전 장관과는 달랐다. 부처 간 갈등을 조율하는 경제사령탑으로서 최소한의 ‘권위’가 필요하다거나 정치권과의 포퓰리즘 전선(戰線)에서 나라의 곳간지기답게 결기를 더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성과를 하나씩 쌓아갈 때 박 장관의 ‘조용한 리더십’도 빛이 날 것이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포스코의 광고 카피처럼.

서경호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