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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60년 버라이어티, 윤복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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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데뷔 60주년. 여섯 살 때 아버지의 창작 뮤지컬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공식 데뷔한 윤복희가 무대에서 60년을 살았다. 그녀에겐 여러 최초가 붙는다. 최초의 아역, 루이 암스트롱과 공연한 최초의 한류, 아마도 최초의 미니스커트 제작자, 그리고 월트디즈니의 보이스 캐스팅 역할을 하는 터라 그 원작을 세계 최초로 보는 사람 중 한 명. 어마어마하다. 정작 그녀는 “난 최초, 이런 타이틀 별로던데”라며 시큰둥했다. ‘최초’를 기억하고 살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좋다는 것을, 윤복희는 그렇게 톡 쏘는 말로 대신했고, 그녀의 앙증맞은 체구가 빛을 발했다.

취재_강승민 기자 사진_하지영(studio lamp)

그녀는 바빴다. 인터뷰 요청을 몇 달 걸러 세 차례 했는데, 모두 퇴짜를 맞았다. 성지 순례를 계획 중이라서, 이사를 해야 해서, 데뷔 60주년 공연 세팅에 시간이 걸려서, 라는 이유였다. 모두 이해되는 이야기들이었고, 여전히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도 눈치를 챘다.

초여름 햇살이 강하던 어느 날, 웨스턴 스타일에 보잉 선글라스를 낀 윤복희를 만났다. 기자를 슬쩍 보더니 “이 선글라스가 당신 나이보다 많을 거다. 40년이 넘었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사진 촬영은 가수 비 콘셉트로 해야겠다”고 농을 걸었다. 윤복희가 눈을 말똥말똥 뜨더니 “비가 누구지? 내가 TV를 거의 안 봐서”라고 궁금해한다.

집에 머물다 기자의 전화를 받고 세수만 간단히 하고 나왔다는 그녀의 피부는 깨끗했다. 비누 거품으로 씻어냈을 맑은 얼굴에는 기미와 주름살 또한 선명하다. 오른쪽 뺨과 귀를 잇는 달걀만 한 크기의 점은 ‘윤복희=자연 미인’임을 증명한다. 최근 그녀가 몇 차례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랐다.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 “남진과 약혼 해프닝 당시, 난 나쁜 여자였다”라고 까발렸을 때,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그녀의 가스펠 송 ‘여러분’을 기가 막히게 불렀을 때였다. 그런데 일부 안티가 있었던 듯하다. 지난 해프닝을 두고 왈가왈부, ‘여러분’을 두고 오빠 윤항기 목사와 사이가 안 좋다느니 등으로 또 왈가왈부. 보다 못한 윤복희가 댓글을 달았다. “내가 윤복희란 사람인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들 그러시냐”고. 윤복희는, 기자가 아는, 소셜 네트워킹을 가장 열심히 하는 ‘딴따라’다. 데뷔 60주년을 맞이한 윤복희를 최근 이사한 경기도 광주의 한 아파트 근처에서 만났다.

윤복희 마음에 바람이 분 거지
윤복희가 본명인가요-애매해요. 그렇게 불리기는 했는데, 호적상 이름은 복기(복 福, 일어날 起)거든요. 10대 때는 어머니 성을 따 성복희로, 그리고 뒤늦게 학교에 들어가려고 보니 출생 신고가 안 돼 있었고, 이후 아버지 호적에 들어가 윤복희가 된 거죠.
뒤늦게 학교를 가셨다고요 여섯 살 때 데뷔해 쭉 무대에서 살았으니까 학교 다닐 생각을 못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복희가 참 똑똑한데, 학교를 다니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란 게 뭐지? 뭔데 그런 얘기들을 하지? 조금 프라이드(자존심)가 상했지(웃음). 그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사촌 오빠를 졸라서 검정고시를 친 거죠. 공연 끝나고 밤에 공부해서 시험을 쳤어요. 중학교부터 들어가려고 했는데, 고등학생으로 합격했죠.

뒤늦게 학교를 가셨다고요-여섯 살 때 데뷔해 쭉 무대에서 살았으니까 학교 다닐 생각을 못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복희가 참 똑똑한데, 학교를 다니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란 게 뭐지? 뭔데 그런 얘기들을 하지? 조금 프라이드(자존심)가 상했지(웃음). 그래서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사촌 오빠를 졸라서 검정고시를 친 거죠. 공연 끝나고 밤에 공부해서 시험을 쳤어요. 중학교부터 들어가려고 했는데, 고등학생으로 합격했죠.

학교생활은 할 만했나요-어느 날은 눈을 뜨니 양호실에 누워 있더라고요. 그럴 만했지. 학교생활과 무대 생활을 동시에 했으니까요. 조퇴를 하고 정문을 나서면 나를 픽업할 택시가 대기해 있고, 그 택시를 타고 삼각지 사무실에 가요. 사무실에서 공연 트럭을 타고 미 8군으로 이동하는데, 그 트럭 안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죠. 공연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2~3시가 되고, 너댓 시간 눈을 붙인 뒤 등교하는 스케줄이었어요. 고등학교 1년을 다니고 학교 추천으로 서라벌예대(중앙대 전신)에 입학했는데, 그해 10월에 루이 암스트롱의 초대로 미국 공연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으니, 학생 신분은 2년 정도였죠.

루이 암스트롱과 인연은 어떻게 된 거죠-내가 열 살 때부터 미 8군 무대에 섰는데, 암스트롱 모창을 한 게 미국까지 입소문이 난 거죠. 한국의 앙증맞은 여자애가 모창을 기가 막히게 한다고. 8군에는 ‘딴따라 등급’이 있는데 난 AA등급으로 늘 최고 대우를 받았죠. 그분이 한국에 오면서 나를 찾은 거예요. 자기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 달라고. 공연이 내 ‘밥줄’인데, 당대 최고가 나를 선택한 거니, 안 응할 이유가 없잖아요. 워커힐 공연에서 루이 암스트롱과 듀엣을 했어요. 대단한 거죠. 공연이 끝나고 2주 뒤, 미국으로 돌아간 암스트롱이 내게 계약서를 보내면서 떠나게 된 거죠. 윤복희 마음에 바람이 분 거지(웃음).

암스트롱은 왜 당신에게 계약서를 보냈다던가요-에이, 그걸 왜 물어봐. 가수들 사이에서 그분 애칭이 팝(PaPa-파파를 줄인 말)이었는데, 내 수양 아버지가 되셨고, 아무튼 그건 ‘축복’인 거죠.

윤복희 하면 여러 전설이 있어요. 비틀스와 윤복희, 이런 얘기도 돌던데, 이건 무슨 얘기인가요-아, 1960년대 초반 영국에서 ‘코리안 키튼’이란 이름으로 4인조 그룹 공연을 했어요. 당시 비틀스가 갓 데뷔를 했죠. 비틀스의 신곡 하나를 우리가 기막히게 잘 불렀거든요. 다음 날『런던데일리』에 비틀스와 ‘코리안 키튼’ 사진이 나란히 실렸지. 기사 내용? 우리가 비틀스 오리지널보다 더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 부르더라는 내용이었지(웃음). 이후 우리가 엄청 유명해졌어요. 그 영상이 지금도 유튜브에 나오던데.

엄마 곁에 가면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것 같아서

부모님을 열 살 전에 모두 떠나보냈죠. 그 ‘정’을 대신해 준 게 있나요-부모의 정이라? 그런 건 몰랐어요. 내가 부모님 손에서 자란 게 아니고, 엔터테이너적인 환경과 어른들 틈에서 자랐으니까. 그러니 부모님이 안 계시니 못 살겠다, 이런 건 적었죠. 어머니가 일곱 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투병하실 때 내가 여관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죽으려고 생각했던 적은 있지. 자살을 생각한 거예요. 엄마 곁에 가면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감정이 어른들이 말하는 자살 같은 것과는 다르기도 했을 것 같은데요-글쎄? 아무튼 내가 어른들 틈에서 자라 조숙하긴 했어요. 그래도 요즘의 사치스러운 단어와는 다른 거지.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생명을 가지고 사치스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다 아구창을 돌려야 해. 지구 위에 얼마나 춥고 배고픈 이들이 많은데.

연예인들에게 그런 나쁜 일들이 종종 있는데요-보세요. 취미 삼아 일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유명해졌어. 그때 컨트롤이 안 되면 유혹들이 속삭인다고. 필요 이상의 돈과 인기, 명예가 다가오면 주체를 하지 못하는 거지. 성형 수술하고, 명품 사는 데 낭비하고, 마약?술?섹스 등 나쁜 무리들이 몰려들지. 추락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어서 정말 조심해야 하는 생활이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본인에게도 그런 유혹이 많았나요-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애들이 있어도 내겐 우스웠지(웃음). 난 연예계 생활을 잘했던 분들과 함께 생활했고, 그분들의 무대 밖 생활도 다 지켜봤으니까요. 삼십대 시절부터 내겐 그 흔한 세 가지가 없어요. 자동차, 가사 도우미, 매니저와 기획사.

열네 살 때 월급을 가불해서 집을 살 정도니까요
이제 데뷔 시절의 얘기를 해볼까요. 여섯 살에 아버지 윤부길 선생이 만든 창작극 ‘크리스마스 선물’ 무대에 오른 게 데뷔였어요. 돌아보면, 이게 아버지에게 받은 큰 선물인 건가요-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는 반대했지. 윤부길 선생이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견우직녀’ 등 국내 첫 오페라를 만들었고, 전쟁 때는 예술인 수천 명을 데리고 부산 피난을 내려가 8군 쇼를 진행했어요. 그때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고 공연료 대신 스튜, 초콜릿 등이 든 식량 박스를 받아온 게 기억이 나요. 공연 의상 만드느라고 부산에 ‘국제시장’이 들어섰고요. 내가 그 무리 속에서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느낀 게 네 살이었고, 그 맛을 안 거지. 여섯 살 때 서울 중앙극장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올리는데, 내가 오빠가 쓰던 양철 필통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무대에 올려달라고 ‘자해 소동’을 벌였던 거예요. 아버지가 ‘그럼 선물로 딱 한 번’이란 조건으로 나를 세웠는데, 그게 빅 히트가 됐어요.

이후 무대에서는 늘 행복했나요-한 번 하고 딱 하기 싫어졌어요. 난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 그런데 엄마 투병하시고, 아버지 떠나고 나니까 급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가 움직이면 돈이 되니까, 누군가 가족을 챙겨야 했는데, 그 역할을 내가 한 거죠.
공연 수입으로 오빠 학비도 댔다면서요 그때 내가 꽤 유명했거든요. 수입이 꽤 됐고, 윤복희가 돈이 좀 있다는 걸 아는 어른들이 돈을 빌려가면 이자도 받았어요(웃음). 당시 8군에서 스페셜 A 클래스였고, 한 달 월급이 4만~5만원이나 됐어요.

4만~5만원이면 어느 정도죠?-지금과는 차이가 클 텐데, 자장면 값과 비교해 볼까요 에이, 이보세요? 자장면이라니. 집값과 비교를 해야지. 몇 달치 월급을 가불해서 열네 살 때 집을 샀으니까요. 당시 오빠가 군대에 있었는데, 제대하면 살 집을 오빠 명의로 구해 주고, 미국으로 떠난 거죠.

어린 나이에 돈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군요-열네 살에 가불해서 집을 살 정도니까요(웃음). 내가 움직이면 항상 따라오는게 돈과 인기였지만, 그런 것들이 내 삶에서 필요한 부분은 아니었어요. 난 비를 피할 공간과 배고프지 않을 정도의 음식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았으니까. 오빠에게 사준 집은 일종의 가장 역할에 충실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난 딱 한 번 첫사랑과 결혼한 여자예요

자, 그때의 윤복희를 떠올리면 최초의 미니스커트 착용자라는 전설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그건 아니에요.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긴 했는데, ‘최초’ 이런 건 모르는 일이라고. 비행기에서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게 CF 장면이었지, 실제 내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내가 미니스커트를 만든 ‘최초’는 맞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무대 의상을 직접 제작했으니까. 내 취미가 바느질이에요. 1960년대 어느 해외 국빈급 공연을 갔는데 드레스를 안 챙겨 간 거예요. 그래서 부랴부랴 원피스를 개조해 미니스커트를 만들었지. 그게 아마 원조일 겁니다. 애인(독일계 혼혈 가수 유주용으로 당대 인기 가수)에게 잘 보이고 싶어 미니스커트를 입긴 했어요(웃음).

지금 말한 애인이 전남편 유주용씨죠. ‘무릎 팍 도사’에서 결혼 얘기, 남진과 약혼 해프닝 사연을 꺼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했어요. 결혼 생활을 정리해 볼까요.-유주용씨와는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십대부터 같이 공연을 하던 오빠였어요. 잘해 주고, 챙겨주고, 돌봐주고 그러다 정이 쌓인 거죠. 어린 나이에 오빠를 알았고, 나중에 가족을 이루면 오빠랑 하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다, 오빠가 프러포즈를 했고, 1967년 내한 공연 때 약혼을 한 뒤 미국으로 떠난 겁니다. 흔히 말하는 불 같은 사랑, 그런 건 아니었고요(웃음).

결혼하면 무대를 떠나 평범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죠 가장으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무대에 올랐지만, 난 무대가 싫었어요. 내 초이스(선택)가 아니었으니까요. 내게 무대는 컴컴하고 춥고 일을 해야 하는 공간일 뿐이었거든요. 그래서 결혼하면 무대를 떠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여기저기 음악 하자는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데, 그걸 다 뿌리친 거야. 그래서 내가 계속 무대에 올랐던 거죠. 이건 내 계획과 완전 반대잖아요.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난 또 프라이드가 세서 그 얘기를 남편에게 못했지. 그런 어느 날, 남편이 질투가 생긴 거야. 어릴 때부터 무대에 섰는데 날 좋아하고 짝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건 아니다, 당신밖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진정을 시켰지. 그런데 하루는 신문을 보라며 건네더라고. 남진과의 스캔들이 난 기사였는데, 평범한 주부로 살겠다는 내 계획이 틀어진 것도 있고, 화도 나고 해서, 홧김에 ‘에라 모르겠다, 그래 맞다!’ 하고 질러버린 거죠.

남진과의 스캔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남진씨가 날 좋아했는데, 그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져와 프러포즈를 하기에 심통 난 상태에서 그냥 받아든 거지. 쌍방 소통이 아니라 그가 날 일방적으로 좋아했다고. 사실 그때 ‘딴 분’이 내 마음에 있긴 했어. 그래서 그게 들통날까 봐 겁도 나서 얼떨결에 남진과 약혼을 하고 났더니, 이거 큰 잘못이다, 난 유부녀 아니냐, 이래선 안 된다는 죄책감이 엄청 크더라고. 그래서 다 돌려주고 없던 일로 했어요. 내가 나쁜 여자였지. 그래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게, 난 딱 한 번 첫사랑과 결혼한 여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생에 ‘만약에’는 없는 거니까요

방금 말한 ‘딴 분’과는 잘 안 됐나요 -(뾰로퉁한 표정으로) 나 좋아했던 남자들 다 말할까. 괜찮았던 남자들 다 말하면 거기서 골라잡을 거야? 지금 와서 뭐 그런 게 중요하다고. 삼십대 초반부터 내가 혼자가 됐는데, 남자들 유혹이 왜 없었겠어요. 내가 세상 물정을 일찍 알고 조숙해서 그런 것도 있을 텐데, 결혼 생활이 참 행복하고 좋았다면 혼자 못 살았을 거예요. 그런데 나로서는 귀찮고 불편하기도 했거든. 그래서 이후로는 그런 것들과 분명한 선을 긋게 된 거죠. 글쎄 몰라, 애를 낳고 무대를 떠나 가정주부로 순탄하게 살았다면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인생에 ‘만약에’는 없는 거니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여럿이 나을 때가 있는데요- (무슨 그런 걸 묻느냐며 툴툴거리는 표정으로)내 나이 낼모레 칠십인데, 어쩌라는 거야? 한 번 더 시집을 보내주겠다는 거야? 난 지금 이 순간이 정말 좋아요. 외모나 경제력, 성격 이런 것 따지지 않아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그분'을 만났잖아요.

(윤복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삼십대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는데, 당시 어디선가 ‘걱정 마라, 괜찮다’는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1976년 2월 27일, 윤복희 나이 서른한 살 때다. 무대에 대한 염증, 결혼 생활 후유증, 스캔들 등이 동시다발로 그녀를 조여올 때 일어난 일인데, 이후 윤복희의 삶이 달라진다. 외국에서 대스타였던 윤복희는 이후 귀국을 했다. 그리고 가스펠 송과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등 전도 뮤지컬, ‘피터팬’ 등 어린이 뮤지컬 등으로 눈을 돌리며 새롭게 무대 열정을 깨운다. 이후 무대는 그녀에게 무지 행복한 공간이 됐다고 말한다. 최근 화제가 된 ‘여러분’은 윤복희가 만든 가스펠 송이다.)
그런 걸 깨달은 겁니다. 난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택해 훈련을 시키셨다고. 내가 돈만 버는 도구가 아니었구나, 이런 것들도 깨달은 거죠. 이후 그렇게 내가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이후부터 늘 신이 난 거예요.

‘여러분’은 임재범이 부르면서 ‘불후의 명곡’이란 걸 새삼 알렸는데요-편곡자가 내가 아는 친구야. 그 친구가 ‘여러분’을 편곡해서 부르겠다고 해서 오케이 했지. 그런데 2절까지는 자신이 없다며 양해를 구하더라고. 보통 노래가 3분 분량인데, ‘여러분’은 7분짜리 곡이거든. 1절만 3분을 넘기고 2절은 영어지. 사실 2절까지 다 해야 스토리가 완성이 되는데, 그래도 공연 3일 전이라 시간이 없다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친구(임재범)가 노래 도중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를 듣고 내 속이 터질 것 같았어요. 이후 그 친구로부터 내가 받은 ‘성령’을 받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이 친구가 영적으로 많이 아픈 것 같아서, 기도(걱정)를 해주고 있어요.
최근 근황 중 궁금한 부분은 이사를 한 겁니다. 전원주택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아파트네요 사실 내가 집이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스라엘에 가려고 했어요. 그런 계획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는데, ‘이제 시작이니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려서 다시 돌아온 거죠. 여기는 예전에 살던 동네예요. 인터넷으로 부동산을 알아보다가 이 집을 골랐죠. 사실 나도 ‘땅이 있는 집’이 좋은데, 주변에서 혼자 살면 번거롭고 위험하다고 하도 말려서 아파트로 들어오게 된 거죠. 공기도 좋고 안전하니까, 주변 잔소리도 없고 참 좋아요. 꼭대기 층인데, 옥상을 내가 쓸 수 있어서 거기 옥탑 방을 만들 계획입니다. 이스라엘 가봤어요? 옥탑 방은 황토로 만들 건데, 거기 흰색을 칠하고, 벽난로도 놓고, 이스라엘 느낌으로 만들어보려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윤복희 이름을 건 최초의 데뷔 60주년 무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뭘 보여줄 생각인가요-내가 지난해 안식년을 가졌어요. 평생 무대에서만 살아온 내게 긴 휴가란 걸 건넨 거였죠. 휴가를 보내면서 지난 생을 돌아보니까 기가 막힌 거예요. 아, 축복이었구나. 누가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도 못 살 인생이구나. 누가 날 인정해 줬고, 예쁘게 봐줬는데, 그분들께 고마움의 선물을 드리는 자리가 될 겁니다. 내 이름을 건 무대는 처음이죠. 난 소극장처럼 작고 소박한 곳에서 따뜻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데, 후배들은 자꾸 성대하게 환갑잔치 하라고 하니, 흐흐.

인터뷰 중간 윤복희가 저 멀리 내다보며 이렇게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 “봐요, 우리가 만날 때와 지금 느낌이 또 달라졌잖아. 난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소중해요.” 기자도 그 자리에서 못한 말을 전해야겠다. “윤복희라는 딴따라가 있어 우리도 무척 행복합니다”라고.

윤복희 사고 이력을 보면 데뷔 60주년의 열정이 보인다
윤복희가 무대에서 환갑을 맞이했다. 이 세월을 끌고 온 과정과 열정을 어떤 말로 대신할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그녀의 사고 이력이 그 열정과 삶을 보여준다. 윤복희는 1986년 ‘피터팬’ 공연 당시 세트가 무너지면서 척추뼈 4개를 다쳤다. 의사는 공연을 강행할 경우 반신불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몸 오른쪽이 일부 마비됐고, 시력이 불안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공연을 강행했다. 그녀의 집과 은행 담보가 걸린 ‘지분제’ 공연인 탓에 ‘아프다’는 핑계로 빠질 수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윤복희는 통증 억제제를 맞으며 사고 이후 4년 동안 공연을 진행했다. 4년의 투병 공연을 마친 어느 날, 세수를 하는데 오른손이 편하게 움직였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니 부러진 척추뼈 4개의 물렁뼈가 살아났더란 얘기. 다만 시력은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이렇게 웃는다. “내 얼굴이 뿌옇게 보이니 진한 화장을 할 필요가 없지. 보이는 세상도 뭐가 낀 것처럼 다 예뻐 보인다”고. 윤복희 패션에도 비밀이 있다. 그녀는 여름에도 롱부츠나 어그 부츠를 착용한다. 이것도 무대 사고의 영향인데, 발이 조금만 차가워져도 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저린 몸을 이끌고 ‘지저스 크라이스트’의 무대에 섰다. 막달라 마리아 역이었는데, 앉아서 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강행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열정이 보여준 ‘기적’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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