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국·프랑스·미국에서 발생한 정치 혁명, 17세기 과학 혁명, 18세기 산업 혁명과 같은 혁명을 통해 자리 잡았다. 오늘날 선진 민주 국가에서 정치 혁명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다. ‘선거 혁명’과 같은 구호에 혁명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기존의 정치·경제 체제를 위·아래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된다. 반면 과학·기술·산업·비즈니스 분야에서는 IT 혁명, 나노 혁명, 바이오 혁명 등 혁명이 당연시된다. ‘집사람·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라는 혁명을 촉구하는 표현에도 설득력이 있다. 정치가 아닌 영역에서 혁명을 구가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과학사학자·과학철학자 토머스 쿤(1922~96)이 쓴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25>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20세기 지성사의 ‘랜드마크’
과학 혁명이라는 말은 러시아계 프랑스 철학자인 알렉상드르 코이레(1892~1964)가 1939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과학 혁명은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에서 뉴턴 과학으로 전환한 과학의 대격변이다. 18세기에 종결된 혁명이다.
과학은 개개의 과학적 발견들이 차츰 쌓이면서 발전하는 것 같지만 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면 구체제(ancient regime)가 무너지듯 예전의 과학도 무너진다. ‘혁명적 과학(revolutionary science)’의 승리로 과학 혁명이 끝나면 과학은 ‘정상과학(正常科學·normal science)’이 된다. 혁명이 끝나면 과학도 정상적인 평상을 되찾는 것이다.
‘정상 과학’을 특징 짓는 것은 패러다임(paradigm)의 존재다. 패러다임은 현실에 대한 전제들(assumptions)의 집합·모델·패턴, 기초 개념의 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공동체를 이룬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믿고 있는 아이디어·원칙의 집합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쿤에 의하면 정상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들은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들(puzzle-solvers)’이다. 정상과학의 시대엔 수수께끼를 푼 과학자들이 수많은 논문들을 쏟아낸다.
아리스토텔레스 읽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정상과학은 언젠가 한계에 도달한다. ‘치즈가 사라진 것’처럼 더 이상 나올 게 없다. 게다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잘 설명이 안 되는 ‘이상현상들(anomalies)’이 발생한다. 정상과학은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하나는 이상현상들을 무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기존 패러다임에 따라 억지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상현상의 누적은 정상과학의 위기를 상징한다. 패러다임이 교체(paradigm shift)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탄생해야 할 국면이 전개된다.
정치 혁명에 혁명가가 있듯, 과학 혁명에도 코페르니쿠스·뉴턴·아인슈타인과 같이 혁신적인 결과를 내는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기존 패러다임에 매몰되지 않은 젊은 과학자들이다. 이들이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면 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동참하는 추종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상현상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수수께끼들을 제시한다. 과학자들에게 ‘일감’이 많아진다.
쿤에 따르면 경쟁하는 패러다임들, 새로운 패러다임과 낡은 패러다임은 같은 기준으로 잴 수 없다(incommensurability). 패러다임의 장단점을 비교하거나 어느 쪽이 우월한지 판단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옛 패러다임에 비해 보다 정확하거나 타당하고 보다 진리에 가까운 게 아니라 보다 유용한 것일 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새로운 사고법을 요구한다. 새로운 정상과학의 일원이 되는 것은 무신론자가 유신론자, 유신론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것과 같은 ‘개종 체험(conversion experience)’을 겪게 한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과 다른 정상과학 사이에 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일종의 ‘번역자(translator)’로 정상과학과 정상과학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쿤이
강의를 위해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포스트모더니즘·창조설도 쿤을 수용
쿤은 창조설(creationism)은 과학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창조설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까지
쿤의
쿤은 자신의 지지자들보다는 반대파들이 더 편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쿤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각도에서 제기됐다. 패러다임 개념의 모호성도 도마에 올랐다. 논리학자들은 쿤이 패러다임을 22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패러다임이 이것 저것을 담는 보자기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수사학적 관점에서는 장점이지만 학문적으로는 단점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과학자들의 실제 연구 활동이 쿤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쿤의 전공인 물리학의 경우, 패러다임의 변화가 뚜렷하지만 다른 과학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아니 물리학마저도 쿤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다는 게 지적됐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판도 나왔다. 사회학자인 영국 워릭대학의 스티브 풀러 교수는 쿤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쿤은 ‘함량 미달’의 학자이며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것이다. 쿤이 학자로서 성공한 것은 하버드대 제임스 코넌트의 든든한 후원 덕분이라는 해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