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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백선엽과 미당시문학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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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재현
논설위원
문화전문기자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의 고향 전북 고창군에 미당시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2001년 11월. 문학관 건립을 놓고 한동안 찬반 논란이 팽팽했었다. 미당의 친일(親日) 경력 때문이었다. 그의 문학적 성취보다 친일을 더 문제 삼는 쪽에서는 문학관 계획 자체를 반대했다. 논의 끝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당의 많은 명시(名詩)들과 함께 몇몇 친일작품도 함께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을 활용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에는 지금도 ‘마쓰이(松井) 오장(五長) 송가’ ‘최체부의 군속 지원’ 같은 일제 시절 작품과 ‘전두환 56회 생일 축시’ 등이 전시돼 있다. 문학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각자 판단하도록 한 것이다. 미당의 일생, 미당의 작품세계에서 친일작품들은 과연 어느 정도 무게를 갖는지 말이다. 2007년에는 미당시문학관에서 ‘미당과 친일문학-식민지 문인의 내면과 친일의 정신구조’라는 학술대회까지 열렸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친일 경력 시비를 보면서 미당시문학관을 떠올렸다. 이 문제도 ‘미당 모델’을 따르면 될 일인데 왜들 그렇게 핏대를 올리는지. 혹시 다른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백선엽은 1920년생이다. 미당처럼 나라가 아예 망해버린 뒤에 태어났다. 버젓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우리와 처지가 같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후대 프리미엄’에 지나치게 기대는 태도다.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거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만주군 장교가 되었고, 요즘 친일 논란에 자주 등장하는 ‘간도특설대’에서 2년여 복무했다. 해방 후 평양에 돌아와 애국지사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그때 김일성도 만난다. 김일성은 그 즈음 백선엽의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정일권·김백일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유광종 저 『백선엽을 말한다』).

 월남해 대한민국 군대에 투신한 백선엽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6·25 전쟁을 맞아 ‘구국의 영웅’이 된다. 전세를 역전시킨 계기로 평가받는 다부동 전투 등 그의 공로는 정말 대단하다. 만약 전쟁에서 김일성 군대가 승리해 우리도 지금 3대 세습왕조 치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끔찍하다. 대한민국은 전쟁영웅 백선엽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20대 초반 몇 년의 일이라 해도 백선엽의 친일 행적은 그것대로 명백히 밝혀지고 비판받을 일이다. 일제하의 만주군 장교 지위는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일각에서 행해지는 백선엽 비판은 팩트(fact)보다 과장과 선동이 더 앞선 느낌이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파헤치기보다 북한에 우호적으로 보이는 옌볜 작가 류연산씨의 글을 전부 사실인 양 인용하는 식이다(류연산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출신이라고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니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항일투사의 내장을 꺼내고 머리를 자르는’ 행위를 실제로 저지른 것처럼 묘사한다.

 누구나 인생 행적에는 잘잘못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백선엽도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면 된다. 6·25 전쟁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다 해서 친일 경력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반대로 친일 행적을 실제 이상으로 뻥튀기해 전쟁영웅의 풍모에 흠을 내보려는 태도도 비겁하다. 사실 해방정국에서 백선엽 같은 군사전문가는 남과 북 모두 필요로 했고, 김일성도 북한 건국 후 일본군·만주국 출신 ‘친일파’ 여러 명을 중용했다. 나는 백선엽의 만주군 경력이 싫지만, 그곳에서 익힌 군사지식이 6·25 전쟁에서 빛을 발한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홍(紅)’보다 ‘전(專)’이 돋보이는 유형이다. 백선엽의 공과는 미당 모델로 풀면 된다. 판단은 각자에게 맡길 일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