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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디지털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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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우리 대조선(大朝鮮)은 아세아주(亞細亞洲) 중의 일왕국(一王國)이라, 기형(其形)은 서북에서 동남에 출(出)한 반도국이니 기후가 서북은 한기(寒氣) 심하나 동남은 온화하며 토지는 비옥하고 물산이 풍족하니라’. 1895년 고종(高宗)의 지시로 펴낸 최초의 근대 교과서 ‘국민소학독본(國民小學讀本)’의 첫 줄이다. 전통 한지에 국한문 혼용의 큰 활자로 인쇄됐는데, 모양새는 영락없이 옛 한문 서책이다.

 교과서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근간이며 학습의 출발선이다. 동시에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국민소학독본’도 그 점에서 다르지 않다. ‘세계 만국(萬國) 중에 독립국이 허다하니 우리 대조선국도 그중의 일국이라’는 둘째 줄 내용만 봐도 그렇다. 일제를 비롯한 구미 열강의 개방 압력에 시달리던 때인 만큼 자주 독립에 대한 백성의 각성을 촉구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 교과서엔 우리나라 역사와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많다. 백성의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개화사상에 눈뜨게 하려는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셈이다.

 이런 근대 교과서가 출간된 지 120년 만에 종이 교과서가 퇴장될 운명이다. 2015년까지 모든 초·중·고교 교과를 대상으로 디지털 교과서가 개발된다. 교과 내용과 참고서·문제집·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인터넷상의 서버에 저장해 두고 개인 단말기로 불러 쓰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접속의 시대’ ‘전자책 빅뱅 시대’의 당연한 귀결이지 싶다. 더군다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가 결과 우리나라 학생들의 ‘디지털 읽기 능력(DRA)’이 세계 최고라지 않는가. 디지털 교과서 다루는 건 일도 아니겠다.

 문제는 디지털 교육에 대한 ‘미신’과 ‘착각’이다. 딱딱한 종이 교과서 대신 멀티미디어 디지털 교재를 이용하면 학습활동의 질이 높아질 거란 생각이 비근한 예다.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사의 지도가 없으면 효과는 기대에 못 미치기 십상이다. 자칫 청소년 인터넷 중독률(12.8%)만 높일 수도 있다. 속도가 빨라지면 생각은 짧아진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의 감성과 지성을 기르는 데는 디지털과 비(非)디지털이 섞이는 게 최선이다.

 디지털 교과서는 교육 수단이요, 학습의 매개일 뿐이다. 그 자체가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건 가르치고 배울 학습 내용과 방법이 아니겠나. 디지털 교과서가 ‘스마트 교육’이 될지, 아니면 ‘사이비(似而非) 교육’이 될지는 이제 교사들 하기에 달렸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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