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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22> 얼굴 빨개지는 로리, 긴장감 즐기는 타이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18면

잭 니클라우스가 햇병아리 프로이던 1962년 US오픈에서 아널드 파머와 연장전을 치르게 됐다. 파머는 니클라우스에게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돈을 똑같이 나눠 갖자”고 제안했다. 당시 그런 관행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니클라우스는 건방지게도 수퍼스타인 파머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돈을 나누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는 짜릿한 외나무다리 대결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대회에서 파머를 꺾고 우승하면서 메이저 18승 행진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파머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정황상 니클라우스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올해 US오픈에서 최저타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로리 매킬로이가 타이거 우즈와 잭 니클라우스를 넘어 메이저 최다승 기록(18승)을 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메이저대회 첫 승 연령(22세)이 니클라우스, 우즈와 비슷하며 기술적인 면에서 이전의 두 거인들에 비해 낫다는 것이 근거다. 일리가 있다. 매킬로이의 공 때리는 능력은 우즈나 니클라우스의 전성기에 비해 우월하다. 그러나 기자는 기록을 깨는 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3년 전 찍은 매킬로이의 TV 화면을 보고 그런 생각이 좀 강해졌다. 주근깨투성이의 천진난만한 아홉 살 소년 매킬로이가 웨지를 들고 TV쇼에 등장했다. 타이거 우즈가 광고에서 하던 볼 튀기기를 먼저 선보였다. 그 다음엔 진짜 테스트였다. 칩샷으로 약 5m쯤 떨어진 드럼형 세탁기의 동그란 구멍에 볼을 넣기였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세 번의 시도까지 실패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네 번째에 성공했을 때 아일랜드 방송사의 사회자는 “미국에 타이거 우즈가 있다면 우리에겐 로리 매킬로이가 있다”고 말했다.

우즈는 어땠을까. 그의 TV 데뷔는 두 살 때다. 마이크 더글러스 쇼에 나왔다. 조그만 캐디백을 메고 신나게 걸어 나온 꼬마는 드라이버로 호쾌하게 티샷을 했다. 긴장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 빛나는 조명과 빨간색 불이 들어온 카메라, 방청객들의 눈길을 즐기는 듯했다. 우즈는 뛰어난 아마추어 골퍼이자 코미디언인 밥 호프와의 퍼트 대결을 즐겼고 이겼다.

어릴 적 비디오를 보면 매킬로이와 우즈는 기질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로리는 얌전하고, 타이거는 활발한 성격이었다. 단순한 무대 체질 차이가 아니다. 우즈는 필요한 퍼트는 꼭 넣고, 큰 게임에서 유달리 강했다. 위대한 선수들은 기질상 긴장된 상황을 좋아하고 큰 무대에 섰을 때 아드레날린을 팍팍 분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다른 선수들처럼 쉬운 슛을 놓치는 경우가 간혹 있었지만 NBA 결승 7차전의 1점 차 시소경기 막판 상대의 겹수비 속에서 던진 결승 슛을 거의 실수하지 않았다. 니클라우스도 비슷하다. 그는 고교 시절 매우 뛰어난 농구 선수였다. 슈팅가드로 오하이오주 대표에 뽑힐 정도였다. 그는 “경기 막판 상대가 파울 작전으로 나올 때 나에게 파울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패배의 책임을 질 것이 두려워 자신에게 공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선수가 대부분이지만 니클라우스는 긴장된 상황이 좋았고, 그런 때 자유투를 더 잘 넣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킬러 본능이기도 하고 클러치 능력이기도 하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위기 상황에서 더욱 힘을 내는 대표적인 선수로 보인다. 아마추어 수준에서도 기질의 차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연습장에서만 잘하는 사람이 있고, 적은 수이지만 실전에 가야 잘 치는 사람이 있다.

매킬로이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마지막 슛을 해서 성공한 일은 아직 없다. US오픈에서 우승했지만 상대와의 차이가 너무 컸다. 야구에서 8-2로 앞서던 8회 말 홈런을 때리는 것처럼 별 감동 없는 마지막 라운드였다. 매킬로이는 골프에 새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 자신은 높아진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짐도 지게 됐다.

개인적으론 TV 카메라 앞에서 겁 없이 드라이버를 휘두르던 두 살짜리 꼬마보다 칩샷을 하면서 얼굴이 빨개진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더 정이 간다. 그 나이엔 그게 어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기질에 가까워 보여서다. 

성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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