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주인은 환자다 (上) 한국만 의사·약사 약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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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15일 의약품분류소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보건복지부는 의사와 약사, 공익위원을 섞어 배치했다. 왼쪽 라인 맨 앞이 최종혁 국립춘천병원장이며 시계방향으로 윤용선 내과개원의협의회 이사, 김준한 변호사, 강정화 소비자연맹 사무총장, 박인춘 약사회 부회장, 고원규 약사회 이사, 최원영 복지부 차관(가운데), 이재호 의협 이사, 이혁 의협 이사, 조재국 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강희정 심평원 부장(21일 열린 2차 회의 때 이병일 심평원 실장으로 교체), 홍진태 충북대 교수, 신광식 약사회 이사. [연합뉴스]


#29일 일본 도쿄 도라노몬의 한 편의점. 얼핏 보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편의점이지만 이곳에는 약국 체인인 ‘쿠오르’가 있는 일반약 판매 편의점이다. 편의점 ‘로손’과 약국이 제휴한 매장이다. 간판과 매장 출입구에는 ‘이곳은 약을 판매하는 편의점’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감기약·해열제 등 갖가지 일반약을 판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외곽에 사는 교포 윤종성(37)씨는 최근 자정 무렵 인근의 대형 수퍼마켓을 찾았다. 아홉 살 된 딸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기침이 심해져 약을 사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상비약을 구비해 두지만 이날은 약통이 비어 있었다. 윤씨는 해열제와 기침감기약을 사서 아이에게 먹였다. 다행히 아이는 금세 기침이 멎었고 잠이 들었다.

 미국·일본·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수퍼에서 파는 약을 전문가들이 결정한다. 약리학(약과 인체 상호작용)·독성학·의학통계학·내과 등 전문가들의 몫이다. 우리처럼 의사와 약사가 사생결단하듯 싸우는 나라는 없다.

 일본은 1998년 전까지는 우리처럼 일반약 수퍼 판매가 금지됐지만 소비자들이 편리하게 약을 사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98년(드링크 등 15개 품목), 2004년(소화제 등 371개), 2009년 제도를 바꿨다. 이를 통해 일반약의 95%를 수퍼 판매약으로 전환했다. 감기약·해열진통제 등은 2009년부터 수퍼 판매가 시작됐다.


 수퍼 판매용 약 분류는 후생노동성 산하 리스크검토회가 했다. 여기에는 약대·의대 교수 각각 3명, 약국대표·병원장·법대교수 1명씩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엔 의약품정보학 교수 한 명이 추가됐다. 10명 중 7명이 전문가다. 리스크검토회에서 약국전용약·수퍼판매약 등의 세부 기준을 만들면 이에 맞춰 제약회사들이 스스로 분류해 공급한다. 기준을 어기면 처벌 받는다. 지금까지 어긴 데는 없다.

  후생노동성 의약식품국 총무과 후지오카 슌타로(藤岡俊太<90CE>)는 “약 분류 과정에서 약제사회(우리의 약사회)가 반대 의견을 내기는 했지만 이해 당사자 간에 갈등이 생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미국·영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비처방의약품(OTC·Over the counter)이 10만 개가 넘는다. 약의 60%가 OTC다. 미국의 약품 재분류는 식품의약국(FDA) ‘비처방약 자문위원회(NDA)’에서 사실상 결정한다. 15개 분야별 약 자문위(피부과·안과 등) 가운데 관련된 2개 이상의 자문위도 대개 같이 참여한다. 두피약 재분류 논의를 한다면 피부과 약과 안약 자문위가 함께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식이다. 의사회와 약사회는 위원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미리 등록하면 의견을 낼 수는 있다.

 영국은 의약품 안전성이 입증되면 소비자들이 쉽게 구입할 수 있게 재분류가 진행된다. 신약은 처방약으로 분류해 수년간 부작용이 별로 없으면 약사 판매약으로 전환한다. 약국약도 수년간 안전성이 입증되면 수퍼용 자유판매약으로 분류된다. 의약품안전청(MHRA) 산하 의약품위원회가 재분류 자문을 한다. 자문위원인 데보라 아시 임페리얼대 의학통계학 교수는 “의약품위원회는 의학·약학대학 교수가 대부분이고, 의학통계학 교수나 생물학 교수도 포함돼 있다”며 “각자 전공 분야 의견을 낸다”고 설명했다. 자문위원은 20명이다. 의대교수와 병원 소속 의사는 내과·소아과·심장병·전염병 전문의 등으로 안배돼 있다. 의사 대표라기보다는 분야별 전문가로 볼 수 있다.

 데니스 노블 옥스퍼드대 의대(생리학) 교수는 “자문위원회는 국민이 필요에 따라 약을 편리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의약품 재분류는 정부가 (자문위원회에 의뢰해) 정해 놓은 규정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의사나 약사 등 이익단체들과의 갈등은 없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박유미·강신후 기자, 박소영 도쿄특파원,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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