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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울서 사흘 체류했나 … 김일성 군대의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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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김일성(1912~94)(左), 박헌영(1900~55)(右)

김일성 군대의 남침은 초반의 거센 공세로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초반의 공세가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일성 군대의 전반적인 남침 전략에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져 일종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대목이다.

 우선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 군대는 사흘 정도 체류했다. 초반의 강력한 공세가 한강 이북에만 국한되면서 준비 없이 전쟁을 맞았던 한국군 지도부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지연전(遲延戰)을 펼칠 시간상의 여유를 찾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급파한 미군이 수원과 오산으로 진격했고, 다시 사단급의 부대를 투입할 시간도 허용하고 말았다.

 김일성 군대의 미심쩍은 서울 체류와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마침내 북으로 밀려난 원인-. JP는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전했다. 그는 10월 1일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에 밀려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가 강계(지금의 자강도)에 임시 사령부를 두고 회의를 열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한군이 침공 뒤에 밀려난 이유로 우선 ‘상상할 수도 없이 빨리 참전한 미군과 유엔군’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 해리 트루먼 당시 미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총사령관의 전격적인 미군 투입과 신속한 유엔 참전 결의로 북한군은 낙동강 교두보로부터 밀려났다. JP는 또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는 개전 초 계속 우세를 이어가며 남하하지 못한 채 서울 등 지역에서 지체하며 공세 속도를 10일 정도 늦춘 것을 그 다음 원인으로 꼽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예상치 못하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장비와 물자를 제 때 실어 나르지 못한 점이 북한이 꼽는 셋째 후퇴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그다음이 가장 중요하다. 남한 좌익 활동을 주재했던 남로당 박헌영의 문제다. 그는 전쟁 전 “(북한군) 침공을 받으면 남한 내 모든 좌익이 봉기해 자연스레 붕괴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김일성에게 했다. 김일성은 이 보고를 믿었고, 개전 초반 서울 점령 뒤 김일성은 남한 내 좌익 봉기를 기다리면서 공세를 늦췄다는 분석이다.

JP는 “이런 내용을 살피다가 김일성이 책상을 두드리면서 마구 화를 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유광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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