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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들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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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마음 한편으론 언제나 죄스러웠다. 딱히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일을 한다는 것이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혼인 초 며느리 노릇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시댁과 친정의 권유로 덜커덕 아이부터 출산했다. 그러고는 유학이다 취업이다 해서 국내외를 옮겨다니는 남편을 따라 1년에 한 번씩은 이사를 했다. 그 와중에 태어난 둘째는 날마다 병치레를 했는데, 그로 인해 다 마쳐가던 박사과정까지 포기하고 귀국해야 했다. 친정어머니조차 아이 목숨이 중요하냐 아니면 네 욕심이 중요하냐고 타이르시는 데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요즘 한 지상파 방송의 주말드라마에, 뒤늦게 직업을 갖게 된 며느리들의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다. 혼인 초기에는 꿈을 접고 며느리와 아내, 그리고 엄마 노릇만 하던 주부들이 뒤늦게 유학을 가서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도 하고, 또 방송작품 공모에 당선돼 작가가 되기도 하는 이야기다. 물론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의 판타지가 아주 흥미진진하게 구현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현실에서의 장벽이 이런 판타지에서조차 등장한다는 점이다.

 시모를 포함한 시댁 식구들은 미술관 큐레이터에게도 방송작가에게도 아들의 내조자로서, 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고 눈총과 막말을 서슴지 않고, 심지어는 일하는 며느리에게 남편과 자식을 위해 ‘거름’이 되라고까지 당당히 주장한다. 이런 압박에 며느리들은 잘 다니던 직장을 마음대로 쉬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욕을 먹기도 한다. 현실에서라면 직장인으로서 너무도 무책임한 행동이었겠지만, 드라마에서는 개인사를 마치 인생의 중대사업인 것처럼 다루고 있으며, 마치 그것이 가족을 위해 여자들만 겪어야 할 신성한 일인 양 여겼다. 남편의 능력보다 우월한 여성의 사회참여는 모두 죄악이며, 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사를 등한시한 대가로 얻는 부당수익인 것처럼 여겼다. 주말에 가끔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불쑥불쑥 역할 혼미로 심적 고통이 심했던 나의 옛 일들이 생각나면서, 고맙기만 한 남편에게 영문 모를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시청자에게 이만큼의 감정이입을 일으켰다면, 이 드라마는 틀림없이 성공한 것이리라. 작가는 아마도 시청자에게 이런 반응을 계획적으로 야기한 것이겠으나, 그래도 너무나 아쉬운 점은 이 드라마에는 아버지는 있어도 남편은 없다는 점이다. 유례없이 가부장적이라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인기 없는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 드라마에서 역시 든든한 배우자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편견은 과거의 잔재에 불과하다는 점이 최근 입증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한류를 통해서다. K팝에 열광하는 외국의 여자 청소년들에게 한국 남성들은 동경의 대상이다. 이들에게 한국 남성들은 섹시하고 역동적이지만 감수성 넘치는 섬세한 존재다. 만일 이런 현상이 착시가 아니라면 한국 남성들은 혼인과 함께 유전자 변형이 오는 것일까? 갑자기 무척 궁금해졌다. 충분히 학계의 주목을 받을 연구 주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