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승낙 해준 뒤 예비 사위 연봉 5000만 원 깎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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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호 14면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알려진 박철우(26·삼성화재)-신혜인(26·서울여대) 커플이 지난 22일 오후 한 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박철우는 배구 국가대표팀의 왼손잡이 주공격수이고, ‘얼짱 농구선수’ 신혜인은 박철우가 속한 삼성화재 배구팀 신치용(56·사진) 감독의 딸이다. 박철우는 지난 시즌까지 삼성화재의 라이벌 현대캐피탈에서 뛰었다. ‘적장의 딸’과 사귀는 박철우는 로미오, 아버지와 남자친구 중 누굴 응원할까 고민하는 신혜인은 줄리엣으로 불리며 화제를 뿌렸다.

팀 에이스 박철우에게 딸 보내는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박철우가 생방송 도중 ‘깜짝 프러포즈’를 했다. 무릎을 꿇고 미리 준비한 반지를 끼워준 뒤 꽃다발도 안겼다. 신혜인은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두 사람의 이름은 순식간에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그날 저녁, 서울 강남의 한 횟집에서 신 감독을 만났다. 방송을 보셨느냐고 물어보니 “팀 훈련 끝나서 사우나 하고 있었어요. 방송 나간다는 얘긴 들었는데…”라며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것 들어보니까 사윗감이 속이 깊던데요”라고 덕담을 했더니 비로소 “철우가 인간성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니까 혜인이를 준 거지”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팀 떠나기 전까진 ‘감독님’이라 불러라”
신 감독과 박철우의 인연은 8년 전인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사대부고 졸업반이었던 박철우는 ‘김세진 이후 최고 왼손 거포’로 실업팀의 스카우트 표적이었다. 박철우는 삼성화재로 기울었다가 조건이 맞지 않아 현대캐피탈로 방향을 틀었다. 신 감독은 “철우가 좋은 선수였지만 근성이 부족하고, 유연성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박철우-신혜인 커플 사진.

그 후 신 감독은 작은딸이 박철우와 사귄다는 얘기를 들었다. ‘운동하는 동갑내기끼리 좋게 지내다 말겠지’ 싶었다. 하지만 얼마 후 큰딸 혜림씨가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아빠, 쟤들 절대 못 헤어져.” 박철우는 그때부터 신 감독을 뺀 나머지 가족을 ‘포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철우가 현대캐피탈 선수단 내부 사정을 신혜인에게 누설한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박철우는 삼성화재만 만나면 죽을 쒔다. ‘박철우를 삼성화재에 데려오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혜인이 접근했다’는 말도 나왔다. 신 감독은 “정말 불쾌했지만 꾹 참았다”고 했다. “지도자로 산전수전 겪은 내가 딸아이한테서 상대팀 정보를 얻는다는 게 말이 되나. 만에 하나 그렇다면 상대는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될 것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박철우는 지난해 5월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었다. 2010~2011 프로배구 V-리그에 출전했지만 거포다운 위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삼성화재의 우승으로 시즌이 끝난 뒤 박철우는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두 차례나 예비 처갓집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신 감독은 자리를 피해버렸다. 근성이 부족한 배구 스타일처럼 마냥 착하기만 한 박철우가 가족을 제대로 먹여살릴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딸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 신 감독은 혜인을 불러 말했다. “그래, 결혼해라. 대신 교육대학원 들어가 교사가 돼라. 철우가 운동선수 끝나면 앞길이 만만치 않을 거다.”

양가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 날짜를 9월 3일로 잡았다. 그리고 신 감독은 팀의 주포인 가빈 슈미트와 재계약을 상의하기 위해 이달 중순 캐나다로 떠났다. 그 기간에 삼성화재는 박철우와 5000만원이 깎인 연봉 2억5000만원에 재계약을 했다. 프로배구 최고 연봉 선수의 자존심도 확 깎여버렸다. 연봉 계약에 실권을 갖고 있는 감독이 슬쩍 자리를 비킨 새였다.

신 감독이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혜인은 불만을 토로하고 짜증을 부렸다. 안 되겠다 싶어 박철우를 불렀다. “철우야, 5000만원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다. 그렇지만 네가 5000만원이 깎인 걸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분발할 수 있다면 그 돈은 몇 백 배 더 큰 가치로 네게 돌아올 거다.” 예비 사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딸까지 불러 쐐기를 박았다. “항상 겸손하고 나대지 마라. 그리고 철우는 내가 삼성화재 떠나기 전까지는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날 ‘감독님’이라고 불러라.”

‘책 속에 있는 길, 읽으면 나의 길’
신 감독은 1995년 11월 삼성화재 배구단 창단 감독이 된 뒤 1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15시즌 결승에 올라 13번 우승을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코트의 제갈공명’이다.

그의 신조는 ‘선수를 믿지 않는다. 훈련을 믿을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수퍼 스타도 그의 혹독한 조련을 견디지 못하면 경기에 나갈 수 없다. 화려한 공격보다는 서브 리시브와 디그(상대 공격을 받아내는 것) 같은 수비 훈련에 주력한다. 코치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지는 경우는 두 가지다. 전날 실수한 장면을 다음 날 개인훈련 시키지 않을 때, 그리고 고참에게 열외를 줄 때다. 막내가 훈련을 쉬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고참이 훈련을 쉬는 순간 밑에서부터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신 감독은 “어느 팀이든 한두 번 우승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상을 꾸준히 지키는 팀은 틀림없이 내부에 좋은 문화가 있다”고 늘 말한다. 좋은 문화란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동료를 존중하고, 훈련에 집중하고, 생활에서 절제하는 것 등이다.

신 감독은 6월 3일 프로축구 수원 삼성 선수단을 상대로 특강을 했다. 수원은 국가대표급 멤버를 보유하고도 연패에 빠져 있었다. 그는 선수들을 향해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자문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코칭스태프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스태프 여러분, 지금 편안하십니까. 여러분이 편안하다면 팀은 지금 문제가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선수들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질 높은 훈련을 하고,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밤잠을 설쳐야 합니다.”

신 감독은 책을 많이 읽는다. 삼국지·손자병법 같은 동양 고전을 섭렵했고,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평전을 읽은 뒤 한동안 평전에 푹 빠졌다. 매 주말 다음주 훈련 계획을 나눠줄 때 최근 베스트셀러 요약본을 첨부한다. 신 감독은 “책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 책을 읽으면 그 길은 내 것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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