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민연금 주당 18만원…런던서 버스도 못 탈 정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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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서유럽 각국은 연금개혁에 나서고 있다. 국가가 보장해 주는 공적연금 비중은 줄이고, 개인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사적연금을 늘리는 추세다. 사진은 유로화 홍보물을 나눠 주는 현장에 몰린 독일의 노인들. [중앙포토]


“영국에서 공적연금(국민연금)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은 겨우 주당 100파운드(약 18만원) 정도입니다. 그 돈으로는 런던에서 버스도 못 타고 다니죠.” 런던에 사는 회사원 마크 베이컨(52)의 말이다. 그는 은퇴 이후를 대비해 월급의 10%를 개인연금에 넣고 있다. 하지만 노후 준비엔 크게 모자란다고 여긴다. 그는 “내년부터 기업에서 연금 보험료를 지원해 주면 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 선진국 서유럽은 지금 연금 개혁 중이다. 금융위기 이후 재정 압박이 커지면서 공적연금만으로는 무섭게 늘어나는 노인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영국은 일찌감치 공적연금을 줄이고 사적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시장을 키워 온 나라 중 하나다. 개인이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영국이 내년부터 ‘개인연금계좌(PA)’를 의무 도입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PA는 월급의 8%에 해당하는 금액을 본인(4%)·직장(3%)·국가(1%)가 나눠 연금으로 적립하도록 강제하는 신종 ‘복합 개인연금’ 제도다. 영국 아비바생명의 해리 스팀스 본부장은 “중소·영세기업은 비용 부담이 늘어나지만 사적연금을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와 함께 영국 정부는 베이컨 같은 개인연금 가입자들에게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개인연금 보험료 중 연간 5만 파운드(약 9000만원)까지 소득공제를 해 준다. 25만5000파운드(약 4억6000만원)이던 소득공제 한도를 지난해 낮춘 게 이 정도다. 영국 생명보험사 프루덴셜(한국에선 PCA생명)의 영국시장 담당 임원 빈스 스미스 휴즈는 “세제 혜택은 되도록 많이 개인연금에 가입하도록 할 뿐 아니라 세금 낼 돈을 투자와 소비에 쓰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역시 공적연금에 크게 기대지 않는 서유럽 국가다. 대신 198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초로 퇴직연금 강제 가입을 도입했다. 근로자 연봉의 7~18%를 직원 본인과 회사가 반씩 나눠 퇴직연금으로 적립하는 방식이다. 스위스 보험사인 취리히금융그룹 데이비드 심스 회장은 “인구가 적고 고령화 속도가 빨라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공적연금 비중을 낮춘 시스템을 일찍 도입했다”며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재정 지출 줄이기에 나서면서 스위스가 이상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에선 공적연금과 퇴직연금만 있어도 소득의 60%가량이 보장된다. 그런데도 국민의 85%는 개인연금에 따로 가입한다. 우리나라 개인연금 가입률(27.5%)의 세 배다. 이에 대해 보험사 스코르의 뮤지크 안드레아스 마케팅 이사는 “소득공제 혜택이 커서 노후 대비는 물론 재테크 수단으로 개인연금이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스위스의 개인연금 소득공제 한도는 6682프랑(약 850만원).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100~200프랑씩 올린다.

 고령화로 공적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건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2044년부터 적자로 돌아서 2060년 이후엔 완전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 재정을 감안해 사적연금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삼성생명 우재룡 은퇴연구소장은 “개인연금 세제 혜택은 늘리고 기존 일시금 방식의 퇴직금을 퇴직연금제도로 전환해 사적연금 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21일 발표된 OECD의 ‘한국을 위한 사회정책 보고서’ 역시 “퇴직일시금에 대한 세제 혜택을 없애고 퇴직연금 개발을 장려할 것”을 권고했다.

런던·취리히=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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