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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비밀계좌 에 ‘한국 돈 5000억’ … 국세청, 꼬리 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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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000억원대의 한국발 검은돈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거쳐 국내 증시로 우회 투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세정당국에 처음 포착됐다. 이 돈이 누구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국세청은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스위스와의 조세조약 개정안이 비준되면 스위스 당국에 관련 계좌 내역을 요청할 계획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조세조약 개정안엔 금융정보 교환규정이 들어가 있다”며 “이 조약이 발효되면 부패 냄새가 나는 돈이 숨을 곳을 찾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15일 국세청에 따르면 검은돈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지난 2월, 국세청 계좌에 뜻밖의 돈 58억원이 들어오면서다. 이 돈을 보내온 곳은 스위스 국세청. 스위스는 “한국 국세청이 받아야 할 몫”이라면서도 누구로부터 거둔 돈인지 등 구체적인 정보 제공은 거부했다. 납세자를 확인하지 못한 국세청은 이 돈을 세외(稅外)수입으로 분류해 국고에 넣었다.

 현행 한국·스위스 조세조약에 따르면 외국 거주자는 한국 상장기업에 투자해 배당을 받으면 한국 국세청은 금융회사를 통해 세금을 원천징수한다. 스위스 거주자가 투자했다면 배당금의 15%를 뗀다. 조약에 따라 한국 국세청이 스위스 투자자에 대해 과세하고, 이 내역을 스위스 국세청에 통보해 준다.

 그런데 스위스 국세청은 이들 중 일부가 스위스 거주자가 아니라고 알려왔다. 한국이 보내준 과세 내역을 확인해보니 일부 납세자가 한국과 조세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제3국 거주자로 확인됐다며 친절하게 5%를 추가 징수해 한국에 58억원을 전해준 것이다. 한국과 조세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의 거주자가 국내 기업에 투자할 때는 배당금의 20%를 과세하는 국내 세법 규정을 적용한 것이다. 스위스가 배당 세액 차액을 환급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세청 박윤준 조세관리관은 “최근 역외탈세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비밀자금이 많이 몰리는 스위스가 자발적으로 협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58억원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자금 중 상당수가 케이맨군도·버진아일랜드·라부안 등 조세피난처에서 투자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제3국 거주자로 위장한 한국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조세피난처에 빼돌린 돈이 스위스 계좌를 거쳐 다시 국내 증시에 투자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스위스는 이번 환급 과정에서 환급 기간을 수년(several years)이라고만 알려왔다. 국세청은 이 기간을 5년 정도로 보고 있다. 이번에 돌아온 58억원에 환급비율(5%)과 시가배당률(2.2%)을 적용해 스위스에 거주하지 않은 자의 한국 투자 자금 규모를 역산하면 1조545억원가량이다. 박 관리관은 “돈의 흐름을 볼 때 이 돈의 절반 정도가 국내에서 빠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5000억원 이상의 한국발 자금이 탈세 등을 목적으로 제3국과 스위스를 거쳐 국내에 재투자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국세청은 4000억원대 역외탈세 혐의를 받고 있는 시도상선 권혁 회장 명의의 국내 은행 홍콩지점 계좌를 압류하려 했지만 홍콩 법원의 결정으로 제동이 걸렸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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