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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더 나은 세상 꿈꾸는 학생의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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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1920~30년대 조선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적을 때는 한 해에 20차례, 많을 때는 100여 차례까지 꾸준히 일어났다. 동맹휴학은 보통 교장이나 교사들과의 갈등, 교과 과정, 학교 시설 등 학원 내의 작은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곤 했다(김호일, 『한국근대학생운동사』, 선인, 2005).

 한 예로 1921년 경성의전의 일본인 교수 구보 다케시(久保武)의 해부학 강의에서 두개골이 분실된 사건이 동맹휴학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보 다케시는 두개골을 훔친 것이 조선인 학생이라고 의심하면서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 상으로 야만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너희의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정녕 너희들 중에 가져간 것”이라는 민족차별적 발언을 하자 조선인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거부하였던 것이다(‘의전(醫專) 사제(師弟)의 대분규’, 『동아일보』, 1921.6.3).

 그러나 이러한 작은 발단이 일제 식민지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고 결국 민족운동의 성격으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즉 1926년의 6·10만세운동이나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처럼 단순히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문제, 전민족의 문제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최근의 대학생들의 움직임들은 특정한 사건, 사안에서 출발했지만 그 기저에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을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학생들이 표면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선결’ 과제라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이 외치고 있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왜 그렇게 절박한지를 곰곰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한 민족교육운동가의 다음과 같은 진단처럼 말이다.

 “결코 그들의 행동은 배후에 하등의 악의가 존재하거나 혹은 정치적 의미를 포함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은 학갈(涸渴)한 지식욕을 채우고자 배우는 현실에서 부족을 느끼고 그것을 학교 당국자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일까 합니다. 또한 학교 존재의 의의는 학생을 본위로 할 것이오, 결코 학교 자체나 규칙이나 선생을 위함이 아닌즉 당국자는 오직 만성(萬誠)을 다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요구에 응할 것을 진력할지요, 결코 엄격한 규칙을 표방하고 학생에 대하여 고압적 수단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조선교육협회 강인택-‘빈발하는 동맹휴학과 금년의 대책여하? 고압(高壓)불가, 성의로 대하라’ 『동아일보』, 1925.1.1)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