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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정말 대마 아닙니다” 월가는 지금 겸손 전쟁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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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알고 보면 우린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종교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다. 미국 월가를 주름잡고 있는 헤지펀드·보험사·뮤추얼펀드가 벌이고 있는 ‘겸손 경쟁’이다. 내년 중반께 이루어질 미국 금융당국의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회사(SIFI·Systemically Important Financial Institution)’ 지정을 피하기 위한 제스처다. 올 들어 워싱턴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는 물론이고 의회엔 SIFI 지정에서 빠지려는 월가 비은행 금융회사의 로비가 치열하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미국 정부는 월가 초대형 은행과 ‘빅3’ 자동차회사 구제에 천문학적인 세금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미국 의회는 지난해 통과시킨 금융개혁법에 ‘대마불사(大馬不死)’ 예방 조항을 신설했다. 파산하면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대마’ 금융회사를 미리 지정해 두고 금융당국이 철저히 관리·감독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대마’로 지정되면 감독당국의 밀착 감시를 받게 된다. 자본금도 더 쌓아야 한다. 이는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비은행 금융회사다. 자산 규모 500억 달러가 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골드먼삭스·씨티그룹·웰스파고 같은 초대형 은행은 어차피 SIFI 지정을 피할 길이 없다. 이와 달리 비은행 금융회사는 애매하다. 금융당국조차 아직 세부적인 지정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 올여름께나 자산 규모나 위험 평가기준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 기준에 따라 1차 지정 대상을 정한 뒤 해당 회사의 소명을 듣는 절차까지 마치려면 빨라야 내년 중반 최종 지정 대상이 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비은행 금융회사의 로비는 치열하다. 시터들이나 폴슨앤컴퍼니 등 ‘월가의 황제’를 자임해온 헤지펀드는 스스로를 ‘미미한 존재’라고 강조하고 있다. 뮤추얼펀드가 굴리고 있는 자산 21조4000억 달러에 비하면 헤지펀드 자산은 1조7000억 달러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보험사인 올스테이트와 하트퍼드는 구제금융 지원 대상이 된 계열 저축은행을 팔아버리는 ‘읍참마속(泣斬馬謖)’ 조치를 불사하고 있다. 파생상품 투기에 뛰어들었다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보험회사 AIG와 차별화하려는 전략이다.

 블랙록이나 피델리티 같은 뮤추얼펀드는 개인만을 상대로 영업한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소매금융사업을 하고 있는 제너럴일렉트릭(GE)도 “월가 은행과 달리 파생상품 거래는 일절 하지 않고 있다”며 “왜 우리가 골드먼삭스와 똑같은 잣대로 감독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변하고 나섰다. 심지어 구매자를 대상으로 금융사업을 하는 보잉·IBM·캐터필러·포드나 연방가계대출은행 같은 공공기관도 SIFI 지정을 피하려고 로비 중이다.

 그렇지만 감독당국의 태도는 차갑다. 감독당국 관계자는 “비은행 금융회사들이 마치 ‘자비의 수녀회’나 되는 양 처신하고 있다”며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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