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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빌려 써라 … IT 영웅들 ‘자기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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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컴퓨터, 인터넷에 이은 정보기술(IT) ‘제3의 물결’ 클라우드 컴퓨팅. 자동차마저 인터넷에 연결되는 데이터 폭증 시대의 해결책으로 급부상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한목소리로 “클라우드 올인”을 외친다. 주도권만 쥘 수 있다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내 기업들도 링에 오를 채비를 갖췄다. IT 거인들의 혈투와 새 기술이 바꿀 미래 세상, 보안 위협과 데이터 독점의 검은 그림자까지 클라우드 컴퓨팅의 현주소를 3회에 걸쳐 살핀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말 그대로 ‘클라우드 격전장’이었다. 지난달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구글개발자회의(구글IO) 현장. 세계에서 몰려온 5000여 엔지니어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용어는 ‘클라우드 컴퓨팅’이었다. 구글은 행사 중 이 기술을 적용한 음악서비스 뮤직베타와 300달러짜리 초저가 클라우드PC 크롬북을 선보였다.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크롬북만 있으면 월 28달러로 완벽한 정보기술(IT)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마침 아마존이 음악서비스 ‘클라우드 드라이브’와 ‘클라우드 플레이어’를 선보인 참이었다. 페이스북과 애플이 유사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실제 애플은 한 달 뒤인 6일, 구글IO가 열렸던 바로 그 자리에서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를 처음 공개했다.


 ◆“주도권 쥘 수 있다면 적과도 동침”=이처럼 클라우드 컴퓨팅을 둘러싼 거대 IT기업들 간 경쟁은 과열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뼛속까지 하드웨어 업체’인 HP의 레오 아포테코 최고경영자(CEO)마저 최근 “클라우드 컴퓨팅은 PC 등장에 버금가는 혁명”이라며 “주도권을 잡기 위해 뭐든지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IBM은 어떤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특정 기업 내부 시스템을 클라우드화해 주는 ‘프라이빗’ 서비스에 주력했었다. 지난달 13일 IBM 뉴욕연구소에서 만난 로런 스테이츠 부사장은 “상황이 달라졌다”며 최근 본격 클라우드 서비스인 ‘퍼블릭(다수의 기업·개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 시장에 뛰어들었음을 알렸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클라우드 ‘올 인’은 더 충격적이다. 세계 1위 소프트웨어(SW) 판매사인 MS에 “SW도 빌려 쓰면 그만”이라는 클라우드식 발상은 치명적이다. MS는 대세를 거스르는 대신 자기파괴를 택했다. 시애틀 본사에서 만난 제이민 스피처 전무는 “구글·IBM 같은 경쟁사는 ‘하던 대로밖에’ 못 하지만 우리는 IT 전 영역에서 고객이 원하는 온갖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화상 인터뷰를 한 시스코의 루 터커 최고기술책임자(CTO) 역시 “연 5조5000억원에 이르는 연구비 대부분이 이 기술 개발과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델·오라클·야후·후지쓰·버라이즌 같은 글로벌 IT기업 중 최근 1, 2년 새 이 시장에 진출하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다.

 ◆애플·구글 무료 서비스는 ‘가두리’=사방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지만 현재 개인 대상 퍼블릭 서비스의 지존은 구글이다. 존 레거링 상무는 “구글은 회사 자체가 클라우드 컴퓨팅이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빨리,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는 검색엔진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폰마저 이 서비스를 염두에 두고 개발했다고 덧붙였다. 구글 대표 서비스인 구글독스(문서도구)와 G메일, 애플의 아이클라우드는 모두 무료다. 서비스 자체로 수익을 내기보다는, 음악·영상을 포함한 각종 콘텐트의 유통 길목을 장악하려는 의도다. 소비자 이탈을 막는 ‘가두리’ 역할도 기대한다.

 그런 만큼 이 분야의 실제적 수익원은 기업시장이다.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아마존은 쇼핑 성수기가 아닌 시기엔 자사 서버의 80~90%가 놀고 있음을 깨달았다. 2006년 외부 기업에 이를 빌려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세일즈포스닷컴은 기업의 방대한 데이터 분석 작업을 클라우드상에서 처리할 수 있게 한 서비스로 각광받는다.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 만난 알 파시온 부사장은 “9만2000개 고객사 중엔 구글·시스코·HP·델 같은 경쟁사들도 있다. 어떤 기업도 서버나 SW를 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세계 컴퓨터사는 5개면 충분”=경쟁이 가열되면서 지난해 말부터 세계 IT업계엔 치열한 인수합병전이 펼쳐지고 있다. 최근 6개월 동안에만 1조원 안팎의 거래가 10건 이상 이루어졌다. 비방전도 뜨겁다. 4월 아마존 클라우드에 사고가 생기자 다음 날 구글이 자사의 안전성을 자랑하는 동영상을 배포하는 식이다. 마크 베니오프 세일즈포스닷컴 창업자는 전 직장 상사이자 초기 투자자인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CEO를 향해 “가짜 클라우드 컴퓨팅은 집어치우라”고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2006년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그렉 파파노폴라스 CTO는 “세계에 컴퓨터는 5대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몇몇 거대기업이 글로벌 IT자원과 데이터를 장악한 상황을 예언한 것이다. 지금 세계 IT 거인들은 바로 그 5개 회사 중 하나가 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특별취재팀=이나리(샌프란시스코·시애틀·뉴욕)·박혜민(도쿄)·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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