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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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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의 군수산업은 극비사항이다. 담당 기관 이름을 정부 공식 조직도에 표시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내각 소속도 아닌 제2경제위원회가 책임기구란 건 '알려진 비밀'이다. 위원회에는 1~10총국이 있는데 2총국이 가장 크고, 그중 핵심은 강계 트랙터 종합공장으로 포장된 자강도의 26호 공장이라고 한다. 여기서 북한 군수물자의 40% 이상이 생산되고 미사일 등은 중동으로 수출, 외화의 45%를 벌어들인다는 설도 있다.

그렇게 돈을 버니 직원 대우도 특별이다. 일반인 식량 배급은 잡곡과 쌀 반반이지만 26호 공장 직원은 잡곡 3, 쌀 7의 비율이다. 식용유나 영양제.전자제품도 나오고 특수 직종 종사자는 콩 10kg을 매달 받는다. 보너스도 있다.

강계시 김일성 혁명사적관 자재 공급 지도원과 강계시 행정위원회의 식량 수급 지도원을 지내다 1993년 탈북한 고청송(가명)씨도 저서 '비밀살상무기공장'에 이런 내용을 썼다. 먹는 문제를 다루다 보면 주변 사정에 좀 깊어지는 법이어서 믿을 만해 보인다. 하기야 정보기관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북한 군수산업을 다룬 연구도 극히 드무니 반박하기도 어렵다.

눈에 띄는 점은 26호 공장 태반이 지하에 있다는 것이다. 공장 안에 있는 분공장의 7개 직장 중 2.3.53호, 반제품 공장 13개 직장 중 5.6.7.21호가 지하에 있다. 완제품 공장의 9.11.13호도 지하시설이다. 본 공장에서 20km 떨어진 장자강 유역의 분공장도 깊은 골짜기를 따라 지하갱도에 있다. 제2경제위원회 소속 공장 가운데 특급인 65호 공장, 1급인 17.62.67.81.93.96.118호 공장도 지하에 있다.

숫자가 많아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북한의 지하에 있는 180여 개 군수공장, 휴전선 부근 1800개를 포함한 8000여 지하 군수시설은 북한 지도부에게 '주체 국방' 꿈을 갖게 하고, 주민들에겐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삶터다.

그런데 '지하'라는 게 옛날과 달리 요즘의 신형 무기 아래선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작다. 이라크 전쟁에서 선보인 '벙커 버스터'(동굴 파괴탄)로 입.출구를 한 방씩 때리면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다. 함북 길주의 지하갱도 작업에 세계의 이목이 쏠린다. 정부 말대로 핵 실험용이 아니라면 또 무슨 '지하의 꿈'을 꾸는 것일 게다. 신무기 앞에서 처량해진 그 꿈을 말이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