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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사건 김현희 15년 만의 외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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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북한에서 27년, 남한에서 23년을 살았다. 어느덧 세월의 무게가 엇비슷해졌다. 북한 사투리와 억양이 언제부턴가 다시 나오기 시작하더란다. 사람들이 물으면 강원도나 연변이 고향이라고 슬쩍 둘러댈 뿐. 인터뷰하던 날 아침, 신문에는 “좌우 꼬리표를 떼고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한국현대사학회 출범 소식이 실렸다.

그땐 그랬다. 영화 ‘써니’의 소녀들처럼 ‘터치 바이 터치’와 나이키 운동화에 열광하며 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을 건너던 시절, 거리의 민주화 열기는 뜨거웠고 이국의 하늘에선 국적 여객기가 산산이 흩어지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산업화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한, 19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에게 88 서울올림픽, 6?10 민주항쟁, 그리고 KAL기 폭파 사건은 한 편의 기억이다. 압축 성장의 밀도만큼 분단국의 긴장은 팽팽했고 이데올로기 분쟁은 격했다. 세기가 바뀌어 기성세대로 살아가는 ‘써니’들에게 80년대는 아련하기도 하고 또렷하기도 하다. ‘써니’들의 청춘 한가운데 낯익은 이름 하나, 김현희.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근해에서 실종된 KAL 858편에는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중동 해외 근로자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사막의 나라에서 외로이 외화 벌이를 하던 우리의 가장들은 가족을 만날 꿈에 부풀어 있던 바로 그때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고 15일 만인 12월 13일 파손된 KAL 구명보트 등 부유물 몇 점이 발견되면서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이라는 사실이 확인됐고, 수사 결과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공작원 김승일은 체포 직전 음독자살했지만 독약 앰풀을 깨물었던 김현희는 미수에 그쳤다. 당시 김현희가 기자회견에서 진술한 테러의 목적은 대통령 선거 교란과 서울올림픽 저지. 커다란 마스크를 끼고 비행기에서 내려오던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 역사의 장면이었다. 그날 이후 북한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올랐고 ‘마유미 김현희’의 운명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지난 정권에서 가짜로 내몰리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실을 지키는 게 어려워도, 결국 역사니까 힘들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전쟁 치르듯 살았지만 개인적으로 내 가정만 봤을 땐 좋고 행복해요. 가족 건강이 가장 큰 소망이죠

당시 김현희가 기자회견에서 진술한 테러의 목적은 대통령 선거 교란과 서울올림픽 저지. 커다란 마스크를 끼고 비행기에서 내려오던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 역사의 장면이었다. 그날 이후 북한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올랐고 ‘마유미 김현희’의 운명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내가 진실임을 매 순간 증명해야 했던 지난 9년

그 사이 23년이 흘렀다.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현희는 2년간의 재판 끝에 “KAL기 사건이 조작됐다는 북한의 주장을 반박하고 증언할 유일한 생존자로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고, 독실한 크리스천의 길을 걸으며 북한의 참혹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강연장을 돌았다.『이젠 여자가 되고 싶어요』『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립니다』등 자전 에세이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책 제목처럼 여자로서의 행복도 찾았다. 지난 97년, 안기부(현 국정원) 수사관 출신 정모씨와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참회하고 속죄하며 조용히 살고 싶다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날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정권의 대북 노선은 달랐고,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며 김현희 역시 조작된 인물이라는 ‘KAL기 조작설과 김현희 가짜설’이 공공연하게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2003년 가을, MBC ‘PD 수첩’에 그녀의 아파트가 노출되자 그길로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집을 나왔다. 김현희씨는 ‘피난살이’라는 단어로 지난 9년을 설명했다.

기자가 초년병이던 시절, 그녀는 최고의 뉴스 메이커였다. 선배 기자들이 김현희 부부의 신혼 생활을 취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단 한 번도 특종의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가짜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근황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 초청으로 3박 4일간 일본을 다녀왔고 천안함 사건 당시에는 북한 실상에 정통한 전문가 입장에서『월간 조선』과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 도호쿠 지역 대지진 피해 복구 성금으로 100만 엔을 기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보는 여전히 제한적이고 조심스러웠다. 이번 인터뷰 과정도 간단치 않았다. 그들 부부와 직접 연락할 길은 없었고, 주선자의 도움으로 접선하듯 질문지를 주고받고 인터뷰 약속 시간을 정해야 했다(주선자 역시 남편 정씨가 공중전화로 먼저 연락을 해 와야 통화할 수 있었다). 인터뷰 당일 지방 모처에서 올라온 그녀 일행은 일곱 명. 그녀와 남편 정씨, 그리고 경호하는 경찰만 다섯이었다. 오십 줄에 접어든 그녀의 얼굴에서 지난 세월과 상처의 흔적을 감출 순 없었지만 고운 자태는 남아 있었다. 전화번호도 없고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그녀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막이 올랐다.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어요. 인터뷰는 오랜만이죠

여성지와는 결혼하고 처음이니까 15년 만이죠. 좌파 정권(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그녀는 좌파 정권이라고 표현했다)이 왜곡한 진실을 밝혀야 할 숙제도 있고 해서 한 번은 인터뷰를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마침 6월이 보훈의 달이기도 하고요. 미국에 사는 먼 친척이 와서 겸사겸사 약속을 한 날로 잡았죠. 아이들 때문에 서울에 오래 있지 못해요.

어느새 오십 줄이 됐네요

그러게요. 아줌마죠, 뭐(웃음). 처녀 때 사진 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어요. 가끔 신문에 내 사진이 나올 때면 새삼스러워요.


‘가짜설’로 오랫동안 편치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2003년에 쫓겨난 후로 9년째 집으로 못 가고 있어요. 방송에서 KAL기 사건 의혹을 밝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국정원에서 인터뷰에 응하라고 하더군요. 내가 진실이고 내가 역사의 증인인데 왜 그런 의혹에 해명을 해야 합니까. 나를 북한의 테러로부터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제껏 나에 대한 정보와 신변을 보호 중인 국가 정보기관에서 방송사에 집까지 알려주면서 취재를 협조하고 공모했다는 게 상식적인 일인가요? 나 같은 사람의 집을 노출시켰다는 건 간접 살인이나 마찬가지예요. 이한영 피살 사건(탈북한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로 1997년 북한 공작원에게 암살되었다)도 있었고…. 밤중에 아이 둘을 업고 나왔는데, 그게 쫓겨난 거와 뭐가 다르겠어요. 그동안 허름한 단칸방에서, 빨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집에서 정말 고단하게 살았어요.

큰아이가 아들인데 초등학교 5학년, 둘째 딸은 2학년이에요. 아직 어려서 정확힌 모르죠. 그래도 항상 나갈 때는 경호하는 아저씨들이 따라다니고, 자유롭지 않아 보이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엄마가 가끔 TV에도 나오는 것 같고, 일본에도 다녀오고, 사회 활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얘기네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짜설’에 대한 책도 나오고, 방송사와 시민 단체에서 여론몰이를 했어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를 한다고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하는데, 한 번도 응하지 않았죠. 내 존재를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잖아요. 분노하고 좌절했지만 결국 내가 풀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거짓 증언을 강요하는 그들의 회유와 협박에 꼿꼿하게 대처하는 것뿐이었어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갈등이 더했겠죠

가족이 있어서 든든한 반면 안타까움도 컸죠. 아마 그걸 노렸을 거예요. 아이 둘 데리고 얼마나 버티겠나…. 국가 기관과 시민 단체와 방송 3사로부터 위협을 받으면서 진실을 지키고 보존하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어요. KAL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니 나로서는 내가 가짜가 아니란 걸 밝힐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쉽게 살고자 했다면 노무현 정권의 요구를 응했을 겁니다. 우리에겐 역사의 죄인으로 사느냐, 그걸 거부하느냐의 문제였어요. 그들의 요구에 응해도, 응하지 않아도 생존엔 위협이 되는 문제였으니까요. 가짜 요구에 응했다면 거짓말을 했으니 훗날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거잖습니까.

신념이란 말로 설명해야 할까요

진실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진실이 뭡니까. 그게 곧 역사 아닌가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사회생활도 경제 활동도 할 수 없습니다. 남편까지도요. 모든 함정을 파놓고,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가짜로 몰아가는데 죽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죽을 각오로 끝까지 살아남아서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집념이 지금까지 날 견디게 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구체적으로 뭔가요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땐 그게 최고의 영광이었고 그보다 더 투철할 수 없었죠. 임무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지만 실패했을 땐 독약 앰풀이라도 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가 기관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해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조작이 아닌 것으로 재조사에 대한 결론을 냈지만 KAL기 조작설, 나를 가짜로 몰기 위한 공작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반성도 없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똑같아요. 그걸 외면하는 건 국가가 자기 존재 이유를 부정한다는 얘기죠. 이건 명백한 도덕적 해이예요. 국정원이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는데, 나이 50이면 중년 신사잖아요. 신사답게 지난 과오를 깨끗이 인정하고 책임지는 정신과 태도를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큰아이가 아들인데 초등학교 5학년, 둘째 딸은 2학년이에요. 아직 어려서 정확힌 모르죠. 그래도 항상 나갈 때는 경호하는 아저씨들이 따라다니고, 자유롭지 않아 보이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엄마가 가끔 TV에도 나오는 것 같고, 일본에도 다녀오고, 사회 활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사춘기가 되면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도 하게 될 텐데요

닥치는 대로 해야죠. 큰 걱정은 안 합니다. 낙천적인 편이기도 하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줘야죠. 집에서는 보통 엄마처럼 지내요. 잔소리하고 먹는 거 입는 거 따라다니면서 챙기고요. 자상한 엄마로 알고 있죠. 아이들이 수줍음도 많이 타고, 순박해요. 아들은 아빠를 닮아서 과묵하고 속이 깊어요. 딸은 표현도 잘 하고 완벽주의 기질도 있고, 저를 닮은 면이 있죠.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학교 갈 일도 생기고 학부모 모임도 생기죠

학교에선 내 존재를 모를 거예요. 잘 안 가니까요. 엄마들과 모여서 정보 나누고, 그럴 처지가 못 돼요. 아이들이 더러 친구 집에 가기도 하는데 우리 집에는 친구들을 데려올 수 없으니까 아이한테 미안하죠. 그런 게 여느 집과 다른 풍경이죠. 아이들을 따로 경호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내 사정이 있다 보니 행동반경에 제약을 받습니다.

집집마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제일 큰 고민거리예요

신문을 봐도 교육 기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어요. 큰아이가 5학년이 되니까 교과서 내용이 어려워지더라고요. 수학 문제는 저도 한참 고민을 하게 돼요. 남자아이라 그런지 오히려 나보다 잘 풀어요. 사회는 5학년 과정이 국사인데, 북에서 배운 것과 달라서 제가 미리 교과서 읽어보면서 공부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따로 학원에 가지 않고 영어까지 저랑 남편이랑 맡아서 가르치고 있어요. 학원 보낼 형편도 안 되고,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특히 남편의 소신이 확고해요. 엄마로서 불안하기도 하고, 외국어는 학원에 보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남편이 반대합니다. 많이 다퉜죠(웃음). 공부는 결국 자기가 해야죠. 또 반드시 공부가 다인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사 필수 과목 지정 문제가 이슈였어요. 남북 관계를 다룬 현대사 내용도 쟁점이었죠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 이전에 비뚤어진 내용을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칼기 사건만 봐도 한 교과서에 그 일로 인해 남북 관계가 악화됐다는 정도로만 기술돼 있더군요. 테러라고 규정하지도 않고, 미국이 한 일처럼 애매하게 설명해 놨어요. 다른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도 않았고요. 현대사는 결국 안보 교육인 셈이에요. 북한에 우호적이고 대한민국을 폄하하는 내용을 바로잡으면 자연스럽게 안보 교육이 되는 거죠. 이명박 정부가 국사 교과서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훗날 오점으로 남을 겁니다.

아이들에게 북한에 대해선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아이들이 밥투정을 하면 가끔 북한 이야기를 합니다. 식량난으로 끼니를 못 챙기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라고. 요즘은 어디서 들었는지, 북한이 가난한 건 핵을 만들어서 그렇다고 제법 응수도 합니다. 북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자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 아직은 막막하고,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어서 지금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알게 놔두는 편이에요.

6월이 보훈의 달인데, 북한 학교의 6월은 어떤가요

제가 어렸을 때 북한에선 6월이면 남한과 미국이 북침한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다고 6?25 전쟁을 엄청나게 선전했죠. 평양시에 있는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이나 황해도 신천박물관에 가서 전투 장면을 재현해 놓은 전시물들을 관람하고 토론도 하고, 전쟁 영웅 할아버지들을 모셔다 전쟁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북에서는 국어 교과서도 전투담을 내용으로 만들어질 정도예요. 그에 비하면 남한에선 그런 교육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친정엄마의 모습이 나올 때가 있죠.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요

외가가 개성의 큰 상인 집안이었어요. 72칸 부잣집에 살았답니다. 집안의 맏손녀로 공주처럼 자라셨다고 해요.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셨는데 그림, 춤, 악기 등 예술 방면에도 재능이 많았어요. 당시에 대학 나온 엄마가 별로 없었죠. 교육열도 아주 높았고요. 엄격했고,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분이세요. 한국에 와서 외가 쪽 먼 친척분과 만났는데, 어머니의 단발머리 여고 시절 사진을 갖고 계시더군요. 어려서는 아버지 닮았단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갈수록 엄마 얼굴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외가가 개성의 큰 상인 집안이었어요. 72칸 부잣집에 살았답니다. 집안의 맏손녀로 공주처럼 자라셨다고 해요. 중학교 역사 선생님이셨는데 그림, 춤, 악기 등 예술 방면에도 재능이 많았어요. 당시에 대학 나온 엄마가 별로 없었죠. 교육열도 아주 높았고요. 엄격했고, 평생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분이세요. 한국에 와서 외가 쪽 먼 친척분과 만났는데, 어머니의 단발머리 여고 시절 사진을 갖고 계시더군요. 어려서는 아버지 닮았단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갈수록 엄마 얼굴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출신 성분도 좋고,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잖아요

아버지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외교관이셨어요. 어려서 아버지 따라 쿠바에서 4~5년을 보내기도 했으니 상류층이었죠. 북한에선 모든 게 의무 교육이지만 엘리트 교육은 달랐어요. 초등학교가 4년제였는데 졸업반 때 성적과 외모, 출신 성분 등을 종합해 학교에서 3~4명씩 추천을 받고 시험을 치릅니다. 평양제일중학교나 평양외국어대학 산하의 중등반이 말하자면 영재 학교였어요. 저도 그렇게 뽑혔는데, 일찍부터 민족 간부 양성을 위해 교육을 시키는 거죠. 소질에 따라 외국어, 과학, 예술 등을 중점적으로 배웁니다.

공작원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어려서 영화에 아역 배우로 출연한 경험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라는 권유도 받았는데 아버지가 반대를 하셨어요. 아버지를 보고 나도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고, 평양외국어대학에 진학했죠. 그때 공작원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외교관이 됐거나 아니면 평범한 현모양처로 살고 있지 않을까요. 공작원 소환 전에 오진우 인민무력부 부장이 나를 보고 간 적이 있었어요. 막강한 권력자의 며느리가 될 뻔한 거죠. 공작원이 되는 순간 내 인생이 달라졌어요. 당 혁명을 위해 국가 최고 권력 기관에서 나를 선발했으니 당시로선 대단한 영광이었죠. 7년 8개월 동안 사상 교육을 받고 기술적인 것들도 배우고, 일본인화, 중국인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고 실패했을 때 자결할 수 있는 투철한 정신 교육도 받았고요. 첫 임무가 올림픽 저지를 위한 칼기 폭파였고 탈출에 실패해 바레인에서 체포된 거죠.

공작원으로 살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결국 그로 인해 지울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이 됐어요. 북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죠. 명절 때나 아이들이 외가에 대한 이야기를 물을 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부모님과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데 가족들 소식은 전혀 모르죠.

1997년 결혼은 대단한 화제였어요

결혼은 못할 줄 알았어요. 죄인이고, 늘 경호와 보호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누구를 만날 상황이 아니었죠. 주변에선 수녀가 되라고 권유하는 분도 계셨어요. 10년 동안 그렇게 살다 보니 자유롭고 싶다고 해야 하나… 독립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내겐 국정원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알던 사람들도 떠나고, 언제까지 이렇게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나, 나이도 먹어 가는데, 이런저런 고민이 생겼죠. 남편은 나를 담당했던 여러 수사관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오래 보니 믿음도 쌓이고, 좋은 사람이란 확신도 생기더라고요. 연애는 2년 정도 했는데, 당국에서 결혼 허가가 안 나 좀 애를 태웠었죠.

그 후로 잠적한 듯 두문불출한 이유는 뭔가요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어요. 소박하고 평범하게요.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자유도 없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게 힘들었죠. 그래서 결혼도 하고, 소신대로 조용하게 참회하면서 살았습니다. 기자분들이 인터뷰하려고 애썼지만 응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찾은 고요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나요

책 봐가며 요리도 배우고, 아이 둘 낳아 키우며 살림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죠. 한 4~5년 정도 정말 행복했어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한 번 내 삶이 소용돌이친 거예요. 쫓겨 다니면서는 생존에 급급했죠. 예전처럼 요리고 뭐고, 그런 게 다 사치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긴 세월 한마음으로 싸우고 견뎌준 남편과는 보통 부부 이상의 유대감이 있겠죠

남편이 같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랑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세월일 겁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겐 죽느냐 사느냐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남편에게 고맙다는 표현은 잘 못하지만 이심전심 알고 있겠죠(웃음).

생활인 김현희로 돌아간 모습이 궁금하네요

아이들과 함께 복닥거릴 때가 가장 행복한 천생 엄마죠. 시간 날 땐 신문 읽고 책도 보고, 드라마도 한두 개 봅니다. 신문은 모든 면을 골고루 다 읽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정치, 사회, 국제면을 유심히 보게 되고요. 최근에 읽은『북한을 선점하라』라는 책이 기억에 남습니다. 북한의 실상과 통일에 대비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어요. 드라마는 모두가 다 보는 ‘웃어라 동해야’ 팬이에요(웃음). 내용은 좀 그렇지만 재밌게 보고 있어요. 크리스천인데 상황이 이러니 교회에는 행사 있을 때만 나가는 편입니다. 대신 기독교 방송으로 좋은 말씀을 듣죠.

얼마 전에 일본 대지진 피해 복구 성금을 기부했다는 소식도 있었죠

작년에 일본 정부 초청으로 일본을 다녀왔어요. 일본인 납북 관련한 이슈였는데, 일본인 납북자의 상징인 메구미 가족을 만나고 일본 경찰과의 면담에서 북한의 납치에 대한 정보도 주고 왔죠. 그 일은 나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어요. 칼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고,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작년 인연도 있고, 일본이 너무 큰 재난을 당해서 뭔가 위로를 드리고 싶었어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얼마 안 됩니다.

북한은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할 겁니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 문제는 말할 수 없이 처참합니다. 집안에서도 큰 일이 생기면 여자와 어린이가 가장 고통을 받잖아요. 북한 아이들의 영양실조 문제나 여성들의 인권 문제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봤으면 좋겠어요. 북한은 남녀 평등을 주장하지만 평등이란 게 노동과 군사 훈련의 문제지 가정으로 돌아가면 여자들이 훨씬 더 일을 많이 합니다. 강제 낙태 같은 심각한 인권 문제부터 턱없이 부족한 속옷, 생리대 등 위생 문제까지 여기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예요. 여성중앙도 여성 잡지니까 북한 어린이와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리대를 보내준다거나…. 그들을 돕고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죠.

새롭게 시작될 또 한 텀의 삶에 대한 기대가 있겠죠

칼기 사건 피해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일이 북한의 소행임을 명백히 밝히는 게 내 소임인 것 같습니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척결한 이유도 테러에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잖아요. 한국은 알카에다의 두 번째 공격 대상이기도 하고 북한으로부터도 항시 위협을 당하고 있어요. 저도 거기에 관련된 사람으로서 테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죠. 또 기회가 된다면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칼기 사건 피해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일이 북한의 소행임을 명백히 밝히는 게 내 소임인 것 같습니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을 척결한 이유도 테러에는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잖아요. 한국은 알카에다의 두 번째 공격 대상이기도 하고 북한으로부터도 항시 위협을 당하고 있어요. 저도 거기에 관련된 사람으로서 테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죠. 또 기회가 된다면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어요.

힘들 날들을 지나왔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그 가치는 지금도 유효한가요

지난 정권에서 가짜로 내몰리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진실을 지키는 게 어려워도, 결국 역사니까 힘들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전쟁 치르듯 살았지만 개인적으로 내 가정만 봤을 땐 좋고 행복해요. 가족 건강이 가장 큰 소망이죠.

북한에서 27년, 남한에서 23년을 살았다. 어느덧 세월의 무게가 엇비슷해졌다. 북한 사투리와 억양이 언제부턴가 다시 나오기 시작하더란다. 사람들이 물으면 강원도나 연변이 고향이라고 슬쩍 둘러댈 뿐. ‘가짜설’과 관련된 대목에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땐 웃음이 가득했으며 남편과의 러브 스토리를 묻는 질문엔 수줍은 표정으로 대신했다. 공작원 생활과 북한의 가족들을 떠올리던 순간에는 깊은 회한이 스쳤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그 부분에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이런 모든 단면이 현재의 그녀를 말해 주는 것이리라. 인터뷰하던 날 아침, 신문에는 “좌우 꼬리표를 떼고 현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한국현대사학회 출범 소식이 실렸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그 안에서 ‘정의’도 구현될 것이다.

그때 공작원으로 뽑히지 않았다면 외교관이 됐거나 아니면 평범한 현모양처로 살고 있지 않을까요. 공작원 소환 전에 오진우 인민무력부 부장이 나를 보고 간 적이 있었어요. 막강한 권력자의 며느리가 될 뻔한 거죠. 공작원이 되는 순간, 지울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이 됐어요

취재_허윤미 기자 사진_김황직(studio 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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